[스크랩] 花樣年華(화양연화)/ 이선영 :: 록키의 나만의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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花樣年華(화양연화)/ 이선영

 

 

가장 불행한 얼굴로

지금이 가장 행복한 때이노라고

리첸 부인은 말했다

 

"정말 많이 보고 싶지만, 먼 후일을 기약하기로 해요"

편지를 써야만 했던 날

 

살아갈 날보다

살아온 날들이 더 많고

 

게임은 거의 끝나가는데

남은 판은 더욱 절박한

 

사십세

 

행복은

불행이라는 돌틈에 숨은 작은 샘구멍

불행은

행복의 부서지기 쉬운 살을 감싼 갑각

 

알겠구나,

평생이

이 뗄 수 없는 연인들과의

부질없는 삼각관계임을!

 

불행의 적요한 한낮을

화(花)-아-양(樣)-연(年)-ㄴ-화(華) 라디오에서 노랫소리가 흘러나올 때

 

불행은 자기가 빠져나갈 틈을 알고 있다

 

- 시집『일찍 늦으매 꽃꿈』(창작과비평사,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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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양연화’는 '인생에서 가장 아름답고 행복한 순간'이라는 뜻을 담고 있는 왕가위의 영화 제목이다. 영화는 상해에서 홍콩으로 이주한 사람들이 주로 거주하는 한 아파트에 두 가구가 이사를 오면서 시작되는데, 이러한 설정만으로 이미 지루함을 예고하고 있다. 이들은 지역신문 편집장 차우(양조위)부부와 작은 무역회사 비서로 일하는 리첸(장만옥)부부다. 남편이 사업상 일본 출장이 잦은 리첸과 아내가 호텔 근무로 자주 집을 비우는 차우는 아파트 주위에서 자주 얼굴을 부딪치면서 꽤 친한 이웃으로 발전한다.

 

 그러던 어느 날 차우는 리첸의 핸드백이 아내의 것과 같음을 발견하고, 리첸 역시 차우의 넥타이가 남편의 것과 같음을 확인하면서 두 사람은 자신들의 배우자가 서로 사귀고 있는 사이임을 눈치 챈다. 배신감에 흐느끼는 리첸을 위로하면서 차우는 어느새 그녀에 대한 사랑의 감정이 자라고 있음을 깨닫고, 리첸 역시 자신의 마음이 점점 차우에게로 향하고 있음을 느낀다. 이쯤 되면 스토리는 빤한 노름인 듯싶지만 영화는 시종일관 느릿한 전개로 별다른 정점에 이르지 못한다. 시간이 흐를수록 자꾸만 뒤쳐지는 지친 마라토너의 시간과도 같다.

 

 이 작품은 왕가위 감독이 과거 '중경삼림'이나 '해피 투게더'에서 보여준 고속촬영 방식이 아닌 슬로모션과 스톱모션을 반복적으로 사용하는데 또 다른 느림의 영상미학을 보는 듯하다. 또 주위의 모든 곁가지들은 걷어내고 오로지 두 인물에만 초점을 맞춘 거라든지, 배경이나 심리묘사 그리고 영상미학 쪽에서 프랑스적인 분위기가 읽혀진다. 아니나 다를까 이 영화는 2000년에 프랑스와 합작하여 그해 칸영화제 남우주연상과 기술대상을 수상했다는 사실을 나중에야 알았다.

 

 영화에서 유난히 눈에 들어오는 장면은 바로 '치파오'라는 몸에 딱 달라붙는 스타일의 중국 전통원피스를 입은 리첸의 모습이다. 이 의상은 1920년대 중국의 변혁기에 고대의 전통 복식에서는 볼 수 없었던 곡선미를 살려낸 개량 의상으로서 중국 기생의 옷에서 발전한 것이라 한다. 싱가포르 항공 여승무원의 제복으로도 유명한데 한때 '싱가포르는 잊어도 싱가포르에어라인은 잊지 못한다'는 광고 카피는 이 옷을 입은 여승무원이 통로를 지날 때 슥 비벼대며 승객들에게 베푸는 스킨십 서비스가 유명한데서 나온 말이다.

 

 장만옥이 입은 이 옷은 그냥 눈요기로서가 아니라 1960년대의 홍콩을 배경으로 하는 이 영화에서 리첸이라는 인물을 형상화하고 왕가위가 의미하는 반어적 화양연화를 표현하는 가장 중요한 매개체로 활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영화의 러닝타임 동안 리첸이 입은 원색 톤의 화려한 치파오는 전부 26벌에 달한다고 한다. 이 원색 치파오를 통해 감독이 의미하고자 했던 화양연화란 결국 껍질뿐인 아름다움 혹은 행복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이다. 

 

 어두운 골목길을 배경으로 국수통을 들고 다가오는 화려하고 부드러운 곡선미의 치파오를 입은 리첸과 아내가 부재중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의 말끔한 정장에 화려한 넥타이 차림인 차우의 스침. '고독을 이기는 유일한 방법은 더 큰 고독에 빠져 드는 것'이라는 어느 시인의 말처럼 더 나은 화양연화를 위해 두 사람의 화려한 의상은 과연 그들의 외로움과 사랑을 도와줄 수 있었을까. 두 사람의 사랑은 그들의 의상처럼 단정하고 격식을 차리면서 느리게 지속되지만 현실적인 이유로 헤어질 수밖에 없었고 더 이상 만나자 못하게 된다. "정말 많이 보고 싶지만, 먼 후일을 기약하기로 해요" 불가에서는 좋은 인연임에도 불구하고 지속되지 않는데서 오는 고통을 인간이 기본적으로 갖고 있는 여덟 가지 고통중 하나라고 한다는데 이 영화는 바로 그런 고통을 아름답게 담고 있다.

 

 그리고 또 하나 이 영화는 음악이 기가 막히게 딱 맞아 떨어져 좋았다. 첸과 차우가 친해지기 전 계단을 올라가고 내려가면서 스쳐지나갈 때 나오는 테마음악은 이 영화의 분위기를 성격 짓는 것 같다. 발걸음마다 리듬을 주는 음악이 힘 있고 들썩거리게 하면서도 쓸쓸하고 서럽고 안타까운 느낌을 주었다(우리 영화 ‘접속’에서도 이 분위가 연상되는 대목이 있었다). 첸과 차우가 처음으로 마주앉아 서로의 눈을 바라보며 식사를 할 때 흐르는 음악도 '아마도 그럴 수 있겠지'란 뜻인,  냇킹콜의 'Quizas, quizas, quizas'인데 많은 사람에게 영화를 두고두고 기억하게끔 하였다.

 

 첸의 대사 중에 "잘못한 것도 없는데 죄지은 것 같아요"하는 말이 있다. 남들과는 다르다는 것으로 위안을 삼으며 이별연습을 한번 해보는데 그들은 울어버린다. 모든 것이 사랑이었고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때는 그렇게 지나가 버리고 만다. 세월은 흘러 차우가 첸을 찾아가지만 '애 딸린 여자 하나'가 산다는 말에 그만 돌아선다. 옛날에는 감추고 싶은 비밀이 있을 땐 산에 가서 나무에 구멍을 뚫고 그 속에다 말을 하고 진흙으로 막았다는 전설의 이야기로 마음을 달래며 산다. 그리고 차우는 이국땅 캄보디아에 첸과의 비밀을 묻어둔다. 첸도 차우를 못 잊어 전화로 찾지만 아무 말도 못하고 수화기를 천천히 내려놓는다. 그의 목소리를 들은 것으로 다였다. 그것으로 아름다웠던 한 시절은 짙은 노을빛 신화가 되었다.

 

 이 시는 영화를 빌미삼은 아마도 시인의 마흔 언저리에서 감응한 ‘신세 한탄’ 쯤으로 들리는데 예슨 즈음의 사람으로는 그저 씩 웃고 말 일이다. 다만 ‘불행은 자기가 빠져나갈 틈을 알고 있다’는 결어는 꽤 솔깃하다. 이 만장한 봄날에 돌이킬 수 없는 것들을, 여전히 만져지지 않는 아름다움을, 스침으로 상처가 된 내력들을 다 내려놓지 못하는 것이 어찌 시와 영화뿐이고, 차우와 첸과 시인만의 일이겠는가.

 

 

권순진

 

  

 

 

 

출처 : 詩하늘 통신
글쓴이 : 제4막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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