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시학 강의/ 임영조 :: 록키의 나만의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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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학 강의/ 임영조

 


대학에 출강한 지 세 학기째다
강의라니! 내가 무얼 안다고?
'시창작기초' 두 시간
'시전공연습' 두 시간
나의 주업은 돈 안 되는 시업(詩業)이지만
강사는 호사스런 부업이다
매양 혀 짧은 소리로
자식 또래 후학들 앞에 선다는
자책이 수시로 나를 찌른다
―시란 무엇인가?
―생이 무엇인지는 알고?
나도 아직 잘은 모른다, 다만
삼십년 남짓 내가 겪은 황홀한 자학
그 아픈 체험을 솔직히 들려줄 뿐이다
누가 보면 딱하고 어림없는 짝사랑
설명하기 무엇한 상사몽 같은
그 내밀한 시학을 가르쳐줄 뿐이다
―시란 무엇인가?
―그건 알아서 뭐 하게!
그게 정 알고 싶으면 너 혼자
열심히 쓰면서 터득하라!
그게 바로 답이니……
오늘 강의 이만 끝.

 

- 시집『귀로 웃는 집』(창작과 비평사,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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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학의 위기니 시의 위기니 하는 담론은 늘 있어왔지만, 그렇다고 문학이 눈 밖으로 완전히 사라지거나 시가 죽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대학의 문창과는 인기 여부와 상관없이 대부분 용케 살아있고, 문예대학이나 시 창작 교실도 도처에 부지기수로 개설되어 시인의 배출 창구 노릇을 하고 있다. 그러니까 속사정이야 어떻든 외견상으론 아직 건재한 듯 보인다. 시인은 대학에 출강하여 시학 강의를 하는 것이 ‘호사스런 부업’이라고 했지만, 대개는 시인이 대학에서 강의를 할 경우 그게 주업이고 간판이고 명함이라고 여긴다.

 

 ‘돈 안 되는 시업(詩業)’이란 만천하가 다 아는 사실이라 새로울 것이 없으며, ‘시란 무엇인가?’하는 물음도 ‘생이 무엇인가’하는 물음처럼 언제나 진부하면서도 난감한 질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의 저서 ‘시학’에서 예술은 이(利)를 생각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했다. 즉, 돈이나 명예나 지위 따위와는 아무 상관없이 자신이 만들거나 쓰고 싶은 것을 사심 없이 만들어 내거나 쓰는 것을 예술이라고 포괄적으로 정의했다. 그는 또한 인간을 ‘모방적 동물’로 보면서, 모방을 통해 쾌락을 느끼고 진실에 보다 더 가까이 접근할 수 있다고도 했다.

 

 진실을 향한 대책 없는 모방이 어쩌면 ‘황홀한 자학’일지도 모르겠다. ‘누가 보면 딱하고 어림없는 짝사랑, 설명하기 무엇한 상사몽 같은 그 내밀한 시학’이라지만 무작정 사랑만으로 시가 쓰지는 것은 아니다. 시의 집을 짓기 위해서는 우선 좋은 자재가 필요한데, 시에서의 재료는 폭넓은 체험과 관찰, 독서와 사색을 통해 구해진다. 릴케가 ‘시는 체험’이라고 정의했듯 인간이 느끼는 희로애락에다가 우리 몸의 감각기관을 통하여 경험하는 정신적인 산물이 망라되며, 그것은 열심히 스스로 체득할 일이다.

 

 그리고 많은 사유를 통해 양질의 상상력이 빚어진다. 결국 상상력의 원천은 체험이고 관찰이며 독서이다. 그 상상력의 나래가 활짝 펼쳐질 때 진실에의 접근이 가능하고, 시가 쓰지는 것이며 시 쓰는 즐거움도 얻을 수 있으리라. 시학이나 창작 교실에서의 강의는 이러한 것들을 즐겁고 기꺼이 행할 수 있도록 돕는 역할의 다름 아니리라. 그렇다면 그 강의는 꼭 시를 잘 쓰는 유명 시인이 할 필요는 없다. 노래교실에서의 노래를 나훈아와 조용필이 가르치지 않는 것처럼.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배우는 사람의 시간과 비용과 노력을 강사가 말아먹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되겠다.  

 

 

권순진

 

출처 : 詩하늘 통신
글쓴이 : 제4막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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