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야영산행 마니아 양승태 대법관 :: 록키의 나만의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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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승태 대법관 - 텐트 7동이나 가지고 있는 야영산행 마니아

 

“힘든 산행으로 담금질하면서 미흡한 점 위안 얻으려 하죠”
             2년 5개월 간 총 38회에 걸쳐 백두대간 종주도 마쳐
▲ 양승태 대법관이 화악산에서 1박을 한 뒤 응봉을 향해 출발하고 있다.
“인간의 지능이 아무리 발달해도, 자연환경이 아무리 달라져도, 인간은 자연의 일부일 뿐입니다.
산에서 자연을 느끼고 자연과 함께하며, 이를 호흡하는 과정에서 우리의 존재를 다시 깨닫는 지혜를 배우고 싶습니다.”

유명한 철학자나 수필가의 말이 아니라 냉철한 법을 집행하는 양승태(梁承泰·62) 대법관 겸 중앙선거관리위원장이 수십 년간 산에 다니면서 체득한 삶의 진리이며 교훈이다. 미약한 존재인 인간이 무한한 자연에서 배우는 겸허한 자세, 즉 인간의 도리를 말하고 있다.

“지금까지 35년 동안 법관으로 지내오는 동안 항상 나에게 부족한 점이 많다는 사실을 느끼고 자신을 채찍질하려고 노력해 왔지만 여전히 미흡한 점이 너무 많은 것 같아 언제나 마음 한 구석이 무거운 느낌을 지우지 못합니다. 내가 험한 산행을 좋아하는 것도 어떻게 보면, 몸이 부서지는 듯한 힘든 산행으로 자신을 시험하고 담금질함으로써 다소간의 위안을 얻으려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자신의 한계를 시험하는 산행으로 삶의 지혜를 배우는 자세를 견지하고 있기에 양 대법관은 후배 법관들의 귀감이 되고, 또한 존경을 한몸에 받고 있다. 그가 등산, 특히 험한 산행을 좋아한다기에 한번 동행하기로 했다. 2월 27~28일 1박2일간 화악지맥 야영산행이었다.

27일 오전 9시쯤 일찌감치 도마치고개에 도착, 산행에 나섰다. 경기도와 강원도의 경계지점이기도 한 곳이다. 그가 화악지맥을 선택한 이유는 지난 2004년 2월부터 2년 5개월간 백두대간 종주를 끝낸 뒤부터 남한의 9정맥을 하나씩 답파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행은 그의 경남고교 동기인 ‘영원한 산꾼’과 고교 후배, 부장 판사로 있는 후배 법관 2명, 비서 등 모두 7명.

2월 말이었지만 예년보다 유달리 눈이 많아 날씨는 꽤 추웠다. 도마치고개에서 화악산으로 오르는 능선 초입부터 짙은 안개가 내려 시야는 불과 몇 미터밖에 되지 않았지만 길 양옆 나뭇가지엔 상고대가 살포시 내려앉아 멀리 보지 않아도 신비하고 아름다웠다. 바람 부는 방향으로 쌓인 상고대는 그 두께만 1㎝가 넘었다. 두꺼운 상고대를 가끔 맛보며 올라갔다.

대법관은 영락없는 산악인의 모습이었다. 3인용 텐트가 든 배낭은 무게가 20㎏는 안 됐지만 10㎏는 훌쩍 넘어 보였다. 앞에는 지도를 묶은 줄을 달고 방향이 애매할 때는 언제든지 나침반으로 지도와 대조하며 확인했다. 그런 노하우를 언제 터득했고, 언제부터 산에 다녔는지 궁금했다.

▲ (좌)화악산으로 향하던 중 여러 등산로가 나오자 지도를 보면서 어느 방향이 정확한지 판단하고 있다. (우)양 대법관이 가져온 텐트를 직접 걷고 있다.

       고교 시절 산악부 활동으로 산 접해

▲ 야영하면서 텐트 안에서 가져온 쇠고기를 능숙한 솜씨로 직접 구우면서 자르고 있다.
“경남고교 시절 누가 나를 특별히 산에 이끈 것도 아니고, 별다른 계기가 있었던 것도 아닙니다. 마치 산에 홀린 듯 저절로 산에 갔다고 보는 편이 나을 겁니다. 아마도 성격 자체가 산에 파묻히는 데 맞는 것 같습니다. 백담사 회주로 계시는 오현 큰스님이 ‘저 사람은 법관이 되지 않았다면 아마도 비구승이 되었을 거다’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는데, 나에게 그런 면이 있다면 내가 산에 오르게 된 것도 그 때문이 아닐까 봅니다. 결국 타고난 성격 때문이겠지요.”

그의 고교 시절은 1960년대 초반이다. 무려 50년 전부터 산에 다녔다는 얘기다.  모두 못 먹고 못 입던 시절 산에 다니면서 자연을 배우고 인생의 호연지기를 기르며 삶의 방향을 세웠다. 지도를 읽고, 야영을 하고, 산행을 하는 건 그의 큰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하나의 여유였다. 산의 큰 가르침을 느끼고 있었기에 그 취미생활은 항상 재미있었다. 

그는 산에 다니면서도 공부를 소홀히 하지 않았다. 그 스스로  산과 공부에 균형을 잡고 있었던 것이다. 이 균형감각은 어떻게 보면 그의 법관 생활에 가장 큰 장점으로 작용하고 있을지 모른다.

“서울대 법대 시절엔 별로 산악활동을 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방학 때가 되면 고시공부 핑계로 깊은 산사에 들어가 공부는 뒷전이고 매일 산이나 헤매고 다녔지요. 특히 재약산 표충사의 말사인 내원암과 강화도 고려산의 백련사에 머물던 기억이 뚜렷합니다.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 기름램프로 불을 밝혔고, 겨울에는 직접 장작을 때서 온돌방을 따뜻하게 했던 40여 년 전의 일을 기억하는 것은 단지 젊었을 때의 추억 때문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의 생활에 산이 주는 의미가 녹아 있다는 말같이 들렸다. 1970년 사법시험에 합격한 이후의 법관생활은 순탄했다. 그러나 그 스스로 자신을 내버려두지 않았다. ‘혼자 있어도 잘 놀고 잠시라도 뭔가를 해야 직성이 풀리는’ 그는 1982년 법원의 장기연수로 런던대학으로 유학을 떠나 법의 깊이를 몸소 체험하기도 했다. 미지의 세계로의 도전은 산을 다니는 사람들이 지니는 공통적인 특성이기도 하다. 혼자 떨어져 몸으로 부딪힌 유학생활은 외롭고 힘들었지만 산행을 통해 쌓은 다양한 도전과 경험들로 이겨나갈 수 있었다.

그는 1986년 제주지법 부장판사, 사법연수원 교수, 서울민사지법 부장판사(1991년), 서울고법 부장판사, 법원행정처 차장, 특허법원 법원장 등을 거쳐 지난 2005년 2월 대법관에 올랐다.  사실 대법관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니다. 인생이 그렇듯 실력도 있어야 하지만 운도 따라야 하고, 선후배의 신망이 두터워야 하기 때문이다. 그는 그 나름대로 법관의 원칙을 견지하고 있었다.

“법관의 제1차적 임무는 법적인 분쟁을 해결하는 데 있다고 봅니다. 분쟁의 해결자가 되기 위해서는 첫째, 그 분쟁의 당사자들로부터 과연 분쟁해결의 주재자가 될 만하다는 신뢰와 존경을 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둘째, 분쟁의 당사자 어느 쪽에도 기울어짐이 없이 양쪽의 이야기를 진솔한 마음으로 경청할 수 있는 균형감각을 갖추어야 합니다. 셋째, 충분한 경험과 법 이론에 의해 분쟁에 대한 적절한 해답을 제시할 수 있는 실력을 구비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법관의 길이 힘들고 외로운 이유는 바로 이러한 자질을 구비하기가 너무나 어렵기 때문입니다.”

“요즈음은 한강기맥 종주 중”
▲ 1박2일간의 화악지맥 종주에 동행한 일행이 기념사진을 찍었다. 왼쪽에서 세 번째가 양 대법관.

냉철한 머리와 따뜻한 가슴으로 분쟁을 판단해야 하는 법관은 항상  누구의 입장을 지지하거나 누구를 미워할 수 없는 정의의 판단을 해야 한다. 그 판단은 다른 사람에게 자문을 구할 수 있지만 최종 결정은 결국 법관 자신의 몫이다. 그가 산에서 얻는 균형감각은 결국 법관으로서의 자질을 알게 모르게 키워놓았던 셈이었다.

이런저런 얘기로 어느 덧 날은 어두워졌다. 눈 덮인 화악산의 밤은 칠흑 같았다. 정말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갑자기 세찬 눈보라가 날리기 시작했다. 일제히 헤드랜턴을 켜고 각자 텐트를 치며 밥 지을 눈을 모으는 등 저녁준비를 했다.

대법관은 열심히 텐트를 쳤다. 그는 갖가지 규격의 텐트를 7개나 가지고 있다. 이번엔 겨울철인지라 약간 무거운 동계용 텐트를 가져왔다. 눈 위에 자리를 깔고 친 텐트 속에 세 사람이 잘 수 있는 공간이 확보됐다. 비닐포대 속에 가득 확보한 눈은 밥 짓고 마시는 물 만드느라 절반 가량을 소비했다. 대법관은 옆에서 밥 짓는 동안 익숙한 솜씨로 열심히 쇠고기를 구웠다. 고기 굽는 석쇠까지 가져와 맛을 더했다. 바로 옆에 앉은 후배 법관은 대법관이 고기 굽고 자르는 모습이 부담스러워 어쩔 줄 몰라 했으나 아랑곳 않고 계속 했다. 주위의 성화로 물려받은 후배 법관은 대법관의 솜씨와 확실히 차이가 났다. “산에 조금 더 따라다녀야 되겠습니다”라며 한바탕 웃었다.

이들의 인연이야 어차피 같은 법관이니 만날 수밖에 없지만, 산에 함께 다니면서 더 돈독히 다져졌다. 양 대법관은 2005년부터 법원산악회 회장을 맡아 산행을 좋아하는 법관들을 산으로 이끌었다. 법원산악회는 1969년 창립된 전통 깊은 산악회로 역대로 산을 좋아하는 대법관이 회장을 맡아 왕성한 활동을 했지만 양 대법관이 맡기 직전 얼마동안은 약간 침체상태에 있었다. 이를 과거 활발했던 수준으로 다시 끌어올렸다.

양 대법관이 2009년 7월까지 만 4년간 회장을 하면서 법원산악회 최초로 일본 다테야마 원행과 백두대간 종주 등을 했고, 많은 법관과 법원직원들이 참여했다. 2년 5개월 간 총 38회에 걸쳐 백두대간 종주를 하는 동안 전 구간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참여한 사람이 5명이었고, 1구간 평균 참여자는 50명에 달했다. 대법관은 집안에 피치 못할 사정으로 딱 한 번 빠졌다가 그 구간을 따로 보충해서 종주를 마쳤다. 장기간 법원의 단일 행사에 그렇게 많은 인원이 참여한 경우가 없을 정도로 대성황리에 백두대간 종주를 마친 것이다.


힘들어도 산의 정기 몸에 배어 다음날 거뜬

▲ 1. 2007년 12월 15일 법원산악회 계방산 송년산행에서. 2. 2009년 9월 5일 한강기맥 종주하면서 오대산 상왕봉에서. 3. 2010년 1월 18일 한강기맥 종주 중 구목령을 지나 운무산으로 향하고 있다.
또 매월 산행을 하면서 단순히 즐기는 차원이 아니라 어려운 이웃도 생각하는 ‘자선기금 마일리지’제도를 창안하여, 후원자가 산행 참석 인원 및 산행거리에 비례하여 갹출하는 자선기금을 마련하였다가 연말에 이웃돕기성금에 후원자의 이름으로 기탁하기도 했다. 최종영 전 대법원장, 이용훈 현 대법원장을 비롯한 대법관 전원과 대한변협회장, 대한법무사회장 등 저명한 법조계 명사들이 대거 후원자로 참여하여 매년 1,000만 원 이상을 자선기금으로 기탁한 것도 큰 보람이었다.

당시 함께 산행했던 후배 법관들은 지방법원 부장판사로 발령받아 나가자, 그곳에서 산악회를 직접 만들어 동료들과 열심히 산에 다니고 있다. 이날 동행한 후배 법관 두 명도 그런 경우였다. 세찬 눈보라와 바람, 칠흑 같은 어둠과 더불어 화악산의 밤은 지나갔다.  아침은 어제 담아놓은 눈으로 물을 만들어 해 먹었다. 다시  목적지인 홍적고개를 향해 출발했다.

“산행은 얼마나 자주, 어떻게 하십니까?”

“2006년 백두대간을 완주한 다음부터는 단일한 산행보다는 일정한 구간으로 이어진 산맥의 종주를 목표로 하는 산행으로 취향이 달라진 것 같습니다. 요즘은 오대산에서 양수리까지 이어지는 한강기맥 코스를 가고 있어요. 한 달에 두 번 이상은 산행하는 것 같은데요. 나는 원래 평이한 산행보다는 다소 험한 산행을 좋아하는 편입니다. 물론 본격적으로 바위를 타는 프로급의 산행을 할 실력은 없습니다만, 평탄한 길보다는 암릉코스라든지 산중 야영을 하는 산행을 더 좋아합니다. 시간을 잘 낼 수 없어 마음껏 하지 못하지만, 가능하면 자주 야영산행을 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는 지난 겨울에도 한강기맥을 하면서 1,000m급 능선상에서 영하 20℃의 추위와 무릎까지 빠지는 눈 위에서 야영 재미를 만끽하기도 했다. 앞으로 체력이 허용하는 한 이런 산행을 계속할 작정이다. 

“골프는 안 치십니까?”

“날씨가 풀리면 이따금 나가죠. 사실 골프는 별로 치고 싶은 마음은 없으나, 몇 번 거절하면 아예 안 치는 줄 알고 연락이 오지 않아  안 나갈 수도 없는 그런 입장입니다. 가급적 줄이고 산에 다니려고 하죠.”

산이 도대체 뭐 길래 이 정도로 빠져들게 되었을까?

“험한 산행으로 몸이 파김치가 되어도 다음 날 일어나면 이상하게도 몸이 가벼운 것을 모두 느낄 것입니다. 산의 정기가 몸에 배어든 까닭이라고 생각합니다. 산행이 생활에 큰 활력소가 되는 것은 두 말할 나위가 없습니다만 등산을 단지 체력증진이나 생활을 즐기는 한 방법으로만 생각하는 것은 진정 산을 좋아하는 사람의 마음은 아닐 것입니다.”

그는 일종의 원칙주의자다. 원칙이 없으면 질서도 없고 혼란스럽다. 현재 하나의 현상을 두고 다른 판결이 나오는 현상은 충분히 이해할 만한 수준이라고 말했다.

“현대 사회는 다양화됐기 때문에 각 개인의 견해가 다를 수 있습니다. 하급 법원에서 나온 서로 다른 결론의 판결을 상소절차를 통해 하나로 귀일시키는 것이 대법원의 임무이지요. 단, 법관이라면 누구나 70% 정도는 동일한 가치관을 공유하여야 한다고 봅니다. 그게 법관의 자질이기도 하죠.”

그는 앞에서 말한 법관의 원칙을 상기시키면서 등산에서도 이 원칙을 강조했다. 등산은 아무렇게나 하는 게 아니고 독도법이나 야영의 원칙에 철저해야 사고가 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가 말한 원칙은 세상의 법칙같이 들렸다. “민주주의의 틀 속에 살자면 권리뿐 아니라 의무에도 충실해야 하지만 우리나라는 의무는 뒷전이고 권리만 챙기려는 사람이 너무 많은 것 같아 혼란스럽다”고 그는 덧붙였다.

산도 보는 관점에 따라 다르지만 기본적으로 산, 그 자체다. 어떤 사람은 산을 변화한다고 하고, 다른 사람은 정적이라고 한다. 하지만 산, 그 자체는 70% 이상이 항상 똑같다. 나머지가 보고 느끼는 관점과 현상에 따라 달라지는 부분이다. 대법관의 주장대로 70%의 관점만 견지하고 있으면 나머지 30%는 다양한 의견으로 수렴될 수 있다. 이 30%를 가지고 아옹다옹할 필요가 없다는 의미다.

그의 말을 듣고 보니, 그를 ‘유연한 원칙주의자’로 보아야 할 것 같다. 이제 목적지에 거의 다 왔다. 인생이 그러하듯 지금 걷고 있는 등산로도 오르막과 내리막이 반복되는 힘든 구간이다. 양 대법관 임기도 이제 1년 정도밖에 안 남았다.

“은퇴 후 품위유지 할 수 있는 여유만 된다면 가급적 변호사 개업은 하고 싶지 않습니다. 후배 법관들에게 부담 주지 않고 전임 대법관 이미지로 그대로 남고 싶은 심정입니다. 남는 시간은 바빠서 못 다한 트레킹이나 원 없이 다녔으면 합니다.”

대법관과의 1박2일 야영산행은 다음을 기약하면서 그렇게 끝이 났다. 

- 글 박정원 월간 산 차장 -
출처 : ironcow6200
글쓴이 : ironcow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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