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인삼종경기' 태그의 글 목록 :: 록키의 나만의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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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기전에 한번은 나가봐야겠다고

마음먹은 뒤인지라 죽어라 달려는

달려는 보는데 이제 쉽지가 않은듯

팔당역에서 자전거용품을 구매하고

돌아오는 길에 찍은 사진들 정리해

올려보는데...중간에 비가 와서리

사진들을 많이 찍지는 못했지만

한강변의 아름다움이 고스란히

들어있어 나쁘지 않은 듯 하다.

 

--- 록키생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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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행복한 중년들
글쓴이 : 휘영청4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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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인촌의 기백

정계에 있던 유인촌은 다소 경직된 편이었다. 논란이 끊이지 않았고 사람들은 그를 희화화했다. 공직에서 내려와 가장 사랑하던 연극 무대로 복귀한 지 6년. 유인촌은 이제 대중과 소통할 심적 여유를 되찾았다. 이제 그를 마음껏 찍어도 좋다. 단, 무대에서 말이다.


유인촌과 인터뷰가 잡히자 주변 사람들이 “성정이 괴팍해서 힘들 텐데…”라며 염려했다. 하지만 걱정이 되기보다 연극이라는 한 분야의 대가를 만나는 자리니 오히려 기대가 됐고 한편으론 ‘대체 어떤 사람이기에’ 라는 의구심이 들었다.

드디어 10월 14일 아침, 유인촌을 인터뷰하는 날. 예술의전당 오페라하우스의 VIP 룸에서 만난 그는 혈색이 좋아도 너무 좋은 피부로 에디터를 놀라게 했다. 뱃살도 전혀 없었고, 올해 예순여섯이라고 하기엔 너무도 건장한 체격으로 촬영장에 있던 어떤 스태프보다 젊고 건강한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촬영을 시작한 후 계속된 에디터와 포토그래퍼의 요구에 “그래요, 그럼 이렇게 할까?”라고 말하며 성심성의껏 따라와줬다. 이따금 편하게 말하기도 했지만 그건 본인보다 한참 젊은 연배를 대하는 통상적 어투에 가까웠다. 그게 반말로 들릴 만큼 기분 나쁘지 않았다.

그는 괴팍한 사람이라기보다 자신의 분야에 자신감이 넘치는 사람이었다. 모든 행동, 언어 그리고 눈빛에서도 여전히 단단한 기가 느껴졌음은 물론이다. 드라마와 영화에 출연하지 않는 게 궁금해서 물었더니 “기력 떨어지면 하려고. TV나 영화는 리얼이잖아요. 더 많이 늙어서 분장이란 게 필요 없는 모습일 때쯤, 그때 하지 않을까?” 그는 여전히 기백이 넘치는 청년같다.

여전히 건강한 기운이 느껴집니다. 마치 이제 무대에 도전하는 청년처럼요

무슨 소리. 이미 여기저기서 ‘노친네’ 소리를 듣고 있는데. 다만 무대에 대한 열정만큼은 지금 막 시작하는 신인 배우들에 크게 뒤처질 수가 없죠. 무대에서 그런 모습을 보였다가는 관객들이 바로 압니다. 연극은 드라마나 영화처럼 끊어갈 수 없으니 체력이 떨어지면 아무래도 큰 배역을 소화하기 힘들어요.

그래서 운동을 많이 하는데, 전 제 몸을 혹사하는 편입니다. 관리가 아니라 거의 중노동이지(웃음). 수영하고 자전거를 좋아하다 보니 자연스레 철인 3종 경기를 했고, 요즘엔 청담동 극장에서 출발해 일부러 한강시민공원 길로 돌아서 예술의전당으로 출근하는데 한 4~5km는 될 겁니다. ‘불편하게 살자’ 가 내 좌우명인데 덕분에 건강은 자연스럽게 관리되고 있네요.

지난해 센세이션을 일으킨 연극 ‘페리클레스’에 다시 합류했습니다

셰익스피어가 쓴 작품이잖아요. 재미가 없을 수 없겠죠. 작년 초연 때 평단의 평가와 관객의 호응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았고, 결국 재연까지 이뤄진 거죠. 1년 반 만에 하게 됐으니 제작진과 출연진 모두 시간이 지난 만큼의 흔적이 작품에 고스란히 묻어날 겁니다.

저 역시도 초연 때 미처 신경 쓰지 못해 놓쳤던 부분을 잘 보완해서 무대에 오를 생각입니다. 4대 비극처럼 무거운 작품이 아니라 낭만이 담긴 희극이니 누구나 쉽게 볼 수 있을 거예요.

연극 ‘페리클레스’는 영국 대문호 셰익스피어의 작품으로 후기 낭만주의의 첫 시작을 알렸다. 연극의 내용은 타이어 왕국의 왕자 페리클레스가 안티오크 왕국 공주의 미모에 빠져 왕이 낸 수수께끼를 풀겠다고 나섰다가 생명의 위협을 받자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여러 나라를 떠돌며 경험하는 파란만장한 인생 역정 스토리다.

‘로미오와 줄리엣’ ‘리처드 3세’ ‘햄릿’ 등의 작품과 더불어 셰익스피어 시대에 가장 인기 있던 레퍼토리였으나 원작의 방대한 스케일과 시대의 언어로 풀어내기 어려운 연출적 난제로 공연된 예가 많지 않았다.

국내에선 2015년 5월 예술의전당 토월극장에서 양정웅이 연출을 맡아 ‘페리클레스’를 초연했는데 그는 노년의 페리클레스 역과 젊은 시절의 페리클레스 역으로 각각 유인촌, 남윤호 부자를 캐스팅했다.

젊은 페리클레스 역은 실제 아들인 남윤호씨가 출연합니다. 동반 출연이라는 사실이 서로에게 부담이지 않았을까요

있었죠. 아들이 속한 극단 여행자에서 만든 작품이라 어떻게 보면 내가 부담이 많았어. 게다가 연극이란 건 오랜 시간 연습하며 쌓은 호흡이 중요한데 나는 나중에서야 캐스팅 제의가 들어왔으니 아들과 같이 해야 할지 고민했죠. 물론 윤호 역시 말은 안 해도 ‘아버지가 하지 않으셨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을지 몰라요.

그런데 아들이랑 “어차피 같은 길을 걸어갈 거라면 언젠가는 분명히 부딪힐 텐데 굳이 피하지는 말자”는 얘기를 했어요. 대신 제작팀 제안대로 우리 부자가 동반 출연한다는 얘기를 언론에 노출하진 않았어요. 그래서 아직도 잘 모르고 보는 사람이 많아(웃음).

배우는 인내심을 갖고 맡은 역할에 대해 스스로 질문하고 답을 찾는 과정을 반복해야 합니다.



남윤호씨가 개명한다고 했을 때 어떻게 조언했나요

아들이 활동하는 데 더 편한 것이 중요했기에 이름을 바꾸겠다고 얘기할 때 전혀 개의치 않았어요. 오히려 스스로 아버지의 그늘에서 벗어나 독자적으로 해보겠다는 의지가 엿보여 기특했습니다.

대선배로서 아들에게 해주고 싶은 것이 있다면요

결과가 금방 나오는 일이 아니고 딱히 정답이 있는 것도 아니잖아요. 배우는 인내심을 갖고 맡은 역할에 대해 스스로 질문하고 답을 찾는 과정을 반복해야 합니다. 다행히도 윤호가 배우라는 꿈을 허황되게 꾸지 않는 것 같아요. 역할이 크건 작건 간에 진지한 자세로 임하고, 연습실과 극장을 갈 때도 늘 대중교통을 타고 다니는 걸 보면 최소한 ‘연극을 하려는 자세는 된 놈이구나’ 싶은 생각이 들어 대견합니다.

윤호도 잘 알겠지만 당장 대단한 인기를 얻거나 얼굴이 알려지는 건 전혀 중요하지 않아요. 지금처럼 배우로서 자신이 갖고 있는 무대에 대한 그림을 천천히 완성시킨다면 언제 어떻게든지 세상의 인정을 받는 날이 올 것입니다.

지난여름 노배우인 전무송, 박정자, 손숙, 정동환, 윤석화 등과 함께 연극 ‘햄릿’에 출연해서 화제가 됐습니다. 서로 의견이 안 맞는다거나 다툼이 있었던적은 없었나요

이미 작품이 끝났는데도 그 연극의 후일담을 궁금해하는 사람이 굉장히 많았어요. “매일 싸울 거다” “절대 끝까지 못 갈 거다” 등등. 근데 대답부터 하자면 ‘노!’ 전혀 없었습니다. 오히려 눈짓만 해도 서로가 어떤 뜻인지 잘 알고 있었기에 연습 때나 무대에서 신나게 뛰어놀 수 있었습니다.

개막한 지 사흘 만에 모든 자리가 매진됐고, 연극계에선 “젊은 후배들에게 교과서 같은 작품이었다”는 찬사가 이어졌습니다. 아마 또다시 그 멤버들이 모이기는 쉽지 않겠지만 노배우들도 뭉치면 ‘햄릿’ 같은 어려운 작품을 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제시한 것 같아 뿌듯합니다.

‘햄릿’은 배우들에겐 영광스러운 작품인데 여섯 번이나, 심지어 예순을 넘긴 나이에도 주인공을 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햄릿 역은 누구나 다 해보고 싶어 하지만 워낙 역할 속에서 다양한 캐릭터를 연기해야 하고 또 배우가 표현하는 방식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는 요소가 많은 역할이기에 많이 훈련한 후 도전하지 않으면 자칫 독이 될 수 있어요.

그래서 ‘햄릿’을 맡은 연출가들은 주인공을 고를 때 굉장히 고심하는 것으로 유명한데, 저의 경우에는 여섯 번 모두 극장 개관 기념이나 중요한 행사 때 햄릿 역을 맡다 보니 연출가를 비롯한 관객들에게 좋은 기억으로 남아 있었고, 그래서 여섯 번째 ‘햄릿’을 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1981년 현대극장 개관 기념으로 표재순 선생이 연출한 ‘햄릿’을 하고서 벌써 35년의 시간이 흘렀네요.

연극 ‘홀스또메르’는 17년간 출연하고 연출까지 맡았습니다. 이 작품에 애착을 갖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홀스또메르’는 러시아 대문호 톨스토이의 중편 소설 『어느 말 이야기』를 각색한 작품으로, 한때 촉망받던 경주마였으나 지금은 늙고 병든 말 홀스또메르를 통해 인생의 희로애락을 이야기하는 작품입니다. 작품 안에 젊음과 늙음, 부유함과 가난함, 참과 거짓 등 인생의 모든것이 들어 있어요.

그런데 이런 이야기를 그냥 사람들이 나와서 하면 평범하고 재미없는 얘기가 되지만 동물들이 등장해 무대에서 가무와 함께 연기하며 우화적인 요소로 극을 풀어가니 하는 배우도 재미있고 관객에게도 몰입도가 큰 작품입니다. 굳이 우리가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려고 노력하기보다 작품 하나를 보고 나면 살면서 필요한 교훈과 철학을 관객 스스로가 느낄 수 있으니 이 극에 임할 때마다 즐겁습니다.

워낙 몸을 많이 써야 하는 역할이라서 인터뷰 때마다 “가장 힘든 작품”이라고 얘기했는데 지난여름 10년 만에 ‘햄릿’을 하고 나니 ‘역시 햄릿’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몸이 힘든 것보단 정신적으로 스트레스를 받는 게 더 큰 것 같아요.

유인촌은 과거 자신이 뛰고 놀았던 ‘무대’로 성공적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에서 물러난 지 6년이 지난 지금도 그에겐 공직에 있던 시절 붙은 꼬리표들이 여전히 따라다닌다. 바로 ‘완장 찬 사나이’ ‘문화검찰관’ 그리고 2008년 국회 문화부 국정 감사 정회 직후 있었던 욕설 파문, 즉 ‘찍지 마’ 사건 등이다.

하지만 그를 이런 불명예로만 가두기엔 아쉬운 부분도 꽤 있다. 사실 유인촌은 1990년 문화부가 신설된 이래 이어령 전 초대 문화부 장관을 넘어 30개월간 재임한 최장수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다.

그리고 각종 경기장과 공연장을 확충했고, 상주 제도를 시행함으로써 국민에게 문화적 혜택을 골고루 돌려주려 노력하기도 했다. 잘못한 것도 분명 있지만 임기를 다 못 마치고 옥살이를 하는 모 부처의 장관들에 비하면 양반이다.


정계에 있던 시절에 파문이 꽤 있었습니다. 아무래도 ‘찍지 마’ 사건이 제일 유명했는데 8년이라는 세월이 흐른 지금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더 정확히 얘기하면 ‘찍지 마, XX’이죠(웃음). 문화부 국정 감사 정회 때 하도 앞에 있는 사람들이 인격적 모독을 하기에 참지 못하고 그러지 말라는 의미로 소리치긴 했어요. 그런데 문제가 됐던 “에이씨”라는 게 나 스스로의 화를 못 이겨 한 말이지 욕을 내뱉은 건 아니었어요.

그런데 그날부터 바로 자극적인 문구 뒤에 ‘XX’ 처리를 해서 기사가 나가더니 마치 내가 정말 욕을 한 것처럼 각종 온라인에 희화화됐죠. 기자들 다 있는 데서 어찌 됐던 나의 분노를 노출했으니 아주 잘 걸렸지, 뭐. 정치에 대해서 잘 모르고 막 들어갔을 때라 여기저기서 물어뜯는 것이었을 텐데 유연하게 대처하지 못한 내 잘못이었어요.

‘회피 연아’ 동영상도 꽤 논란이 됐죠

그건 정말 조작이었지. 김연아는 당시 최고의 스포츠 스타였기에 지나가는 사람마다 알아보고 또 악수를 청하고 할 텐데, 얼마나 귀찮겠어요. 내가 그런 심리를 모르는 것도 아니고. 장관으로서 격려차 공항에 마중을 나가야 한다고 해서 화환을 건네며 팔을 툭툭 친거 말곤 없는데, 내가 무슨 포옹을 하고 키스를 시도했다니…. 그건 말도 안되죠. 공항에 취재진이 다 있는데 상식적으로 그게 말이 안 되잖아요. 근데 그걸 누리꾼이 짜깁기 영상을 만들어 유포했고 ‘그러다 말겠지’ 했더니 일파만파 퍼지더라고. 그래서 이대론 안 되겠다 싶었죠.

그때 동영상 제작자 및 유포자를 명예 훼손으로 고소했는데, 이게 또 논란이 됐습니다

제작자 및 유포자 8명을 찾아내 명예 훼손으로 고소를 했더니 “너무 지나친 처사다” “장관이 인터넷의 자유를 탄압한다”라는 반응이 나왔죠. 쉽게 말해 ‘웃자고 만든 건데 죽자고 달려드냐’는 건데 그건 당해보지 않곤 몰라요. 모두가 나에게 손가락질하는 상황에서 그걸 어떻게 그냥 넘어갑니까.

그래서 정식으로 수사를 의뢰해 동영상이 조작이었다는 사실을 밝혔는데 이런 부분은 아무도 관심을 갖질 않았죠. 대중은 자극적인 것만 관심을 갖지 진실엔 크게 관심이 없거든요. 한예종 사태 때도 당시 문화부 앞에서 시위하던 학부모, 학생들과 대화로 풀고 싶어 일일이 반응하고 대답을 했더니 그것도 편집된 영상으로 온라인에 올라가서 ‘막말하는 장관’이라는 욕을 먹었죠.

제 나름대로 국민과 최선을 다해서 소통하려고 했던 건데…. 지금 생각하면 사실 확인이 되지 않은 불미스러운 그런 사건들 때문에 제가 마치 크게 잘못한 사람처럼 비친다는 게 아쉽긴 해요.

그래도 이것만큼은 국민의 문화생활 수준 향상에 기여했다고 생각하는 것이 있다면요

다시 배우로 돌아와서 예술계 사람들을 만나면 다 예전에 나를 못 죽여서 안달이 났던 사람이 대부분이더라고(웃음). 그 사람들이 “그래도 예전엔 장관님이 있어서 시원하게 욕이라도 했었는데 지금은 들어줄 사람조차 없어서 씁쓸합니다”라고 얘기하더군요.

제가 임기 동안 바로잡으려 노력했던 건 지식 재산권과 저작권 보호 문제였어요. 일단 미국 무역대표부(USTR)에서 매년 지식 재산권 감시 대상국을 뽑는데 제가 집권한 지 1년 만인 2009년에 우리나라가 그 리스트에서 빠졌죠.

그리고 당시만 해도 영화나 음원 모두 불법 다운로드가 성행할 때지만 최소한 음원에 관해선 작곡자, 작사자, 실연자 등으로 나눠 창작의 권리를 보호하는 데 기틀을 마련했다고 생각해요.

또한 대중가수가 마음껏 무대를 펼칠 수 있도록 올림픽공원 내 낡은 체육관을 리모델링해 최신식 공연장을 마련했고 서울 용산구에 위치한 옛 국군기무사령부 수송대 부지를 국방부와 협의 끝에 국립극단에게 사용권을 넘겨준 것도 국민이 문화생활을 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고 생각해요.

체육계의 엘리트 교육을 지양하고 특히 학생 야구와 축구 선수도 평일에는 수업에 참여하고 주말에 시합을 하도록 바꿨죠. 당장은 깨지고 성적이 나오지 않아도 아이들의 미래를 보고 한 결정이었어요.

아직도 이따금 정치 쪽에서 러브콜을 받는다고 들었습니다. 다시 정치에 출마할 생각이 있을지 궁금합니다

절대. 이미 물러나서 연극 무대로 돌아온 지 6년째입니다. 한 번 물러난 일은 다시 하고 싶지 않습니다.

연극배우에서 브라운관의 톱스타로, 다시 정치인으로, 또다시 무대로 귀환하며 참 바쁘게 살았습니다. 아내의 든든한 내조 없이는 불가능했을 것 같아요

늘 선택의 기로에 설 때마다 나를 먼저 헤아려주는 사람입니다. 내가 끊임없이 일을 만들고 벌려도 “당신이 하겠다고 하면 해야죠”라고 해요. 일찍 결혼하는 바람에 성악가라는 꿈을 접었던 아내가 늘 눈에 걸려서 제가 두 아이를 키우고 아내는 이탈리아에 유학을 보낸 적이 있어요. 한 남자의 아내와 아이들의 엄마라는 타이틀을 잠시 뒤로하고 예술가로서 꿈을 이루도록 응원하고 싶었거든요.

공부를 마치고 귀국해서 독자적으로 자신의 길을 잘 닦아 중앙대학교 성악과 교수까지 임용돼 후학 양성에 매진하며 즐거워했는데 제가 공직을 시작하자마자 교수 신분을 내려놓고 다시 가정으로 돌아와 나와 아이들의 뒷바라지에 전념한 여자입니다. 항상 고맙고 감사해요.

그동안 수많은 일이 있었습니다. 가장 행복했던 시절은 언제인가요

물어봐서 뭐해. 1971년 처음 연극을 시작할 때죠. 그땐 모든 게 어렵고 힘들었어요. 그러면서도 내가 앞으로 무언가 할 수 있겠다는 희망으로 가득 차던 있었죠. 작품을 하는 것도 아니고 그냥 극단 막내로 무대를 청소할 때조차 뭔가 내안에 새로운 것들이 쌓이는 느낌도 들었고요. 지금 이 나이 먹도록 무대에 선다는 사실도 충분히 행복하지만 그 시절 행복의 크기와는 비교할 수 없어요.

‘페리클레스’가 끝나면 또다시 지방 공연을 다닐 예정이라 들었습니다. 지방에 집중하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어디에나 예술은 존재해요. 근데 출신이 다르다고 서로 대립하고 배척하다 보니 같은 땅덩어리에 있는데도 어떤 극이 있고 어떤 작품이 있는지 잘 모릅니다. 제가 최근에 했던 ‘홀스또메르’는 광주와 목포에서 무대를 올렸는데 모두 그 지역 출신 배우들을 선발했어요. 특히 목포에선 폐공장을 리모델링해 공연했는데 제 평생 커튼콜을 할 때 관객 전원이 기립해서 환호한 적은 처음이었습니다.

지방의 배우도 충분히 훌륭했고 관객들은 더 말할 것도 없이 대단했죠. 각 지역마다의 예술적 특색이 있는데 서로 영감을 주고 교류하는 일을 하는 장을 만들고 싶어요. 개인적으로 이런 시도를 10여 년 전에 한 번 하긴 했었죠. 강원도 봉평면의 폐교를 활용해 만들었던 달빛극장이었고, 지역에서 반응도 꽤 좋았는데 제가 공직을 하면서 신경 쓰지 못해 결국 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지금부터라도 열심히 지방을 돌아다니며 활성화시켜봐야죠. 저를 보고 싶어 하는 분들요? 그동안 텔레비전에서 공짜로 편히 보셨잖아요. 이젠 돈 내고 직접 극장을 찾아서 봐주세요. 후회 안 하실 겁니다.



기획_이충섭 | 사진_YOON SANG MYUNG
여성중앙 2016.11월호

출처 : 행복한 중년들
글쓴이 : 나강쇠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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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I Love Soccer (축구동영상)
글쓴이 : [OL] No.28 Arnold Mvuemba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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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즘 수영/헬쓰/골프/요가등 건강과 운동에 관심이 많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트라이애슬론은 듀애슬론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1972년 미국내에 건강 달리기 운동의 창시자 중의 한 사람인 샌디에고 변호사 데이비드 페인이 생일을 맞아 10Km 달리기와 1/2마일 수영으로 된 바이애슬론 대회를 개최하며 시작됐습니다.

어원상 라틴어로 tri 3가지, athlon 경기의 합성어로 수영,사이클,달리기 3종목을 연이어 하는 3대 유산소성 스포츠를 조화와 균형을 중시하며 극기와 인내심을 요하는 경기입니다.

1974년 샌디에고 트렉클럽의 두 회원이 바이애슬론에 자전거 타기를 가미해 진정한 첫 트라이애슬론대회를 현재의 시월드 주변에 피에스타섬에서 개최했으며,
이 미숀베이 트라이애슬론은 2.8마일 달리기, 5마일 자전거 타기, 0.25마일 수영, 2마일 달리기, 0.25마일 수영으로 구성되었습니다.

이후 1977년 오아후 릴레이 마라톤 대회 시상식에서 수영선수, 사이클선수, 마라톤선수 중 누가 더 좋은 선수인지에 대하여 친구들과 논쟁을 벌이는 것이 지겨워진 해군 중령 죤 콜린이 와이키키에서 2.4마일 수영, 115마일 섬 한 바퀴를 사이클, 26.2마일 호로룰루 마라톤 이 세 종목을 하루만에 완주하는 것을 제안을 했고
그리고 이 종목을 완주하는 사람은 누구나 자신을 iron man이라고 칭할 수 있다고 발표했습니다.
왜냐하면 첫 대회에 여성 출전자가 없었기에 man 이라고 칭했다고 합니다.

1989년 국제연맹(ITU)이 프랑스 아빈용에서 창설이되었고 첫 트라이애슬론 세계선수권대회가 개최되었습니다. 트라이애슬론종목은 기성 종목들(수영 1,500m, 사이클 40km, 달리기 10km)에서 차용하여 정식 코스를 만들었으며 이 정식 코스가 월드컵 시리즈에 도입되었고 올림픽 종목으로 채택되게 되었습니다.

1994년 파리 IOC총회에서 2000년 시드니 올림픽 정식종목으로 수영 1.5km, 사이클 40km, 달리기 10km 도합 51.5km를 채택 하여 2000년 시드니 올림픽에서 여자부 경기가 개막경기로 치러졌고, 올림픽 첫 메달을 받게 되는 영광을 얻었습니다.  2000년 모스코바 IOC총회에서 2008년 그리스 올림픽에도 태권도와 함께 정식종목으로 채택되어 올림픽 영구종목으로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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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철인 3종경기 연맹에 가입하면(가입비 2만원) 대회 참가시 매회마다 참가비 2만원 할인됩니다.

※ 철인3종 경기 연맹 주소 : http://www.triathlon.or.kr/

올림픽 코스 외에 스프린트 코스로 수영 750m 사이클 20km 달리기 5km의 half 코스도 있습니다.

관심있는 분들의 많은 참여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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