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검정 비닐봉지의 소소한 생각/ 한옥순 :: 록키의 나만의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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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정 비닐봉지의 소소한 생각/ 한옥순


이마트 앞에만 가도 왠지 주눅이 든다

백화점에 들어가는 일은 상상도 못한다

언젠가 체크무늬 가방을 스쳐가듯 본 적 있다

그 물건은 나 같은 건 거들떠도 안 본다는 듯

우아하고 거만하게 내 앞을 지나갔다

어쩐 일인지 나는 숨이 컥, 막히는 것 같았고

바보처럼 부스럭 소리도 못 내었다

도대체 누가 이런 열등감을 가르쳤을까

아니다 타고난 본성이다

스스로 터득한 싸구려 본능이다

검고 질긴 비닐봉지의 태생이다

 

내 속엔 대체적으로 싸구려가 들어간다

지저분한 것, 질척한 것들도 들어가곤 한다

종종 만 원에 세 장짜리 꽃무늬 팬티도 들어간다

어떤 것은 내 속에서 죽어가거나 썩어가는 것들도 있다

그럴 땐 내 몸도 함께 가차 없이 버려진다

얼마나 한이 많으면 나는 생전 죽지 않는다

죽어도 죽어서도 녹지 않는다

미리부터 새까맣게 질려 태어난 이 몸뚱이로는

구멍 난 데로 한을 쏟아내는 일 밖에는 다른 수가 없다

아가리를 있는 대로 턱 벌려 숨 한번 쉬고

꺼지는 수밖에 별 도리 없다

젠장, 세상에 무슨 이런 인생이 다 있는지...


- 월간「우리시」2010년 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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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를 웬만큼 골고루 접해본 독자라면 폐타이어라든지 바람에 풀풀 날리는 검정비닐봉지 따위가 시의 소재로 심심찮게 애용되고 있음을 알 것이다. 도시문명의 구석과 그늘을 상징적으로 고발할 때, 현대문명에서 풍요와 편익의 불편한 뒷감당을 말할 때 그 기재로 대개 활용된다. 패드 병이나 녹슨 못, 깨진 벽돌조각이나 유리조각도 마찬가지다. 영화 '밀양'의 마지막 장면에서 사용된 깨진 거울도 같은 의미겠는데, 그나마 그 대목은 희망의 빛을 중첩시켜 보여준 것 같았다.

 

 이 시는 ‘검정비닐봉지의 소소한 생각’들을 모아놓았다. 그 쓰임새는 백화점 봉투나 별다를 게 없는데 내용물은 천양지차다. 그 속엔 대체로 ‘싸구려’ ‘지저분한’ ‘질척한’ 감추고 싶은 것들이 들어가곤 한다. 문성해의 ‘검은 비닐봉지들의 도시’에서처럼 ‘반쯤 썩은 고양이와 음식 쓰레기들과 세상에서 가장 물컹하고 가장 불결한 어떤 것을’ 품기도 한다. 백화점이 상류층이라면 이마트는 중산층에 비유된다. 재래시장 좌판에서 산 만원에 세 장짜리 꽃무늬 팬티가 든 검정비닐 봉지를 흔들고는 쪽 팔려서 그 앞을 얼쩡거리지도 못한다.

 

 때로 성질이 나면 내용물과 함께 가차 없이 버려지기도 한다. 그리고 ‘얼마나 한이 많으면’ ‘생전 죽지 않는다.’ 쉽사리 흙 속으로 스며들지 못하고 풀들의 자양분이 되지도 못한다. ‘아가리를 있는 대로 턱 벌려 숨 한번 쉬고 꺼지는 수밖에’ 없는데, 그조차도 ‘구겨진 물개 가죽처럼 하수구에 처박혀 있는 놈’이 있는가 하면, ‘차도 한가운데로 무법자인양 뛰어든 놈’도 있다. 날다가 덜컥 나뭇가지에 걸리면 마른잎사귀 시늉을 하는 놈도 있다지만 ‘젠장, 세상에 무슨 이런 인생이 다 있는지...’ 시인은 필시 ‘이런’과 ‘인생’ 사이에 상투어이긴 하지만 ‘개 같은’이란 말을 넣으려다가 점잖은 체면에 참았던 것 같다.

 

 

권순진

 

출처 : 詩하늘 통신
글쓴이 : 제4막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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