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람의 손을 타지 않는 곳으로 호젓하게 떠나는 여정
여행지로 보자면 전남 장흥은 색깔이 옅다. 이웃한 보성이 차밭으로, 강진이 다산초당과 백련사로 ‘강렬한 인상’을 주지만, 장흥에서는 이렇다할 이미지를 떠올리기가 쉽지 않다. 그렇다고 장흥이 보성이나 강진에 비해 ‘빠지는 여행지’라는 뜻은 아니다. 가을이면 온통 억새로 반짝이는 천관산도 빼어나고, 겨울에는 내저리 일대의 매생이도 일품이다. 소설가 이청준, 한승원의 고향마을 바닷가의 정취도 빼놓을 수 없다. 이렇듯 여행지로서의 매력을 두루두루 갖추고 있지만, 장흥은 이른바 ‘결정적인 한 방’이 모자란다. 그래서일까. 장흥 땅에는 미처 여행자의 눈길이 닿지 않은 곳들이 도처에 있다. 손을 타지 않은 매혹적인 여행지들이 아직까지 소박한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것이다.
‘새로운 것들의 발견’. 장흥을 여행하는 재미는 바로 이런 것일지도 모른다. 장흥으로의 여행은 다른 여행자들에 의해 반듯하게 길이 난 곳을 따라 매끈한 관광지들을 둘러보는 것과는 다르다. ‘다들 좋다는 곳’을 찾아가는 무난한 여정에서는 만날 수 없는 것들이 도처에 있다. 많은 여행자들로부터 검증되지 않은 곳인데다 여행정보도 다른 곳에 비해 턱없이 적어 걱정스러울지도 모르겠지만, 장흥 땅을 찾아가보면 알게 된다. 그런 걱정이 기우였음을….
장흥에서 이즈음 가장 각광받는 곳이 장흥읍 부근의 억불산 자락의 편백숲이다. 편백나무가 늘어선 13만2000㎡(약 4만평)의 산림욕장은 도무지 멋이라고는 털끝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우드랜드’란 이름 하나만을 제외하고는 나무랄 데 없다. 어쩌자고 아름다운 숲에 이런 단세포 같은 이름을 붙여놓았는지…. 비가 내리는 날, 산림욕장의 편백나무 향기는 아찔할 정도로 짙다. 산림욕장에는 노천탕도 있고, 쌀겨효소로 잘 발효된 톱밥을 덮고 온열욕을 즐기는 찜질방도 있다. 숲을 거닐고 찜질을 즐기면서 족히 반나절을 보낼 수 있는 곳이다.
# 배롱나무 꽃송이가 떠있는 연못과 숲을 둘러친 고택.
억불산 자락에서 산림욕장보다 더 눈길을 끌었던 곳이 바로 산림욕장 인근의 평화리 ‘상선약수 마을’이다. ‘상선(上善)’이란 노자 도덕경에 나오는 말이다. 노자의 말씀 한 구절. “상선(上善)은 물과 같다. 물은 만물을 이롭게 하지만 다투지 않는다. 그러면서 뭇 사람들이 싫어하는 (낮은) 곳에 닿는다. 이 때문에 도에 가깝다.” 한마디로 최상의 선(善)은 물과 같고, 몸을 낮춰 아래로 아래로 흐르는 물은 도(道)에 가깝다는 뜻이겠다. 이름대로 마을에는 오래된 약수터가 있다.
평화리에서 가장 매혹적인 공간은 오래된 소나무와 배롱나무(목백일홍)를 둘러치고 있는 연못이다. 소나무(松)와 백일홍(百)이 있는 연못(井)이라 해서 ‘송백정(松百井)’이란 이름이 붙여졌다. 이즈음 매끄러운 수피의 가지를 구불구불 뒤틀고 선 배롱나무 거목들이 석달열흘을 피어난다는 백일홍꽃을 연못에 후드득 떨구고 있다. 떨구는 꽃색깔의 채도와 명도가 다 다르다. 선혈처럼 붉은 것이 있는가 하면, 주황색 은은한 것도 있다. 순백의 꽃도 있고 자줏빛이 짙어 보라색으로 보이는 것도 있다. 연못은 독립운동가이자 국회의원을 지낸 고영완씨의 고조부가 조성한 것이라는데 아마도 나무를 심을 때부터 꽃의 색깔을 염두에 뒀던 듯싶다. 이즈음 갖가지 색의 꽃이 떨어져 송백정 연못에 떠있는 모습은 마치 색색의 한과를 펼쳐놓은 것 같다. 아니나 다를까, 마을 주민들은 “배롱나무 꽃이 떨어질 무렵 송백정을 ‘한과연못’이라고 부르기도 한다”고 했다.
연못 옆에 바짝 붙어있는 짧지만 어둑한 숲길 끝에 고영완 가옥이 있다. 아름드리 거목이 담장 아래서 둥치를 뻗고 있고, 둥글게 휘어지는 짧은 돌계단 주위에는 이끼와 양치식물들이 촉촉한 습기로 반짝인다. 한쪽에는 대숲이 하늘을 가리고 서있다. 청량한 초록으로 가득한 풍경이다. 오래된 집과 자연이 이렇게 서로 잘 어울릴 수 없다.
# 정자에 들어 겹쳐지는 이야기들을 만나다
장흥에서는 탐진강변의 정자를 따라가는 여정을 빼놓을 수 없겠다. 소쇄원이나 식영정 같은 전남 담양의 이름난 정자에 비하면 화려함이나 운치는 미치지 못하지만, 탐진강변을 따라 들어선 10여곳의 정자들은 저마다 소박하고 고즈넉한 멋을 품고 있다. 다른 지방의 이름난 정자들의 ‘밖에서 정자를 보는’ 경관이 빼어나다면 탐진강의 정자는 ‘안에 들어 밖을 보는 맛’이 더 좋다.
먼저 사인정. 탐진강이 강진으로 건너가기 직전의 설암산 자락 도로변에 사인정이 있다. 조선 초기 이조참판을 지냈던 김필이 단종폐위 후 어지러운 세상을 한탄하며 벼슬을 버리고 낙향해 은둔하던 정자다. 김필은 정자에 머물며
매일 단종이 묻힌 북쪽을 향해 4번 절을 하고, 정자 뒤편의 바위에다 단종의 얼굴을 그려넣었다고 전해진다. 그림의 자취는 지금도 희미하게 남아있다.
정자는 사방으로 마루를 두르고 가운데 방을 들였다. 방 안에 들어 서늘한 마루에 앉아 문을 활짝 열어젖히고 밖을 내다보면 숲이 우거져 온통 초록빛이다. 그저 고즈넉하게 앉아있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다 순해지는 느낌이다. 사인정 정자 기둥에는 주련이 걸려 있는데 그중 글귀가 금색으로 칠해진 것이 눈에 띈다. 다름 아닌 세종이 내린 ‘어제(禦題)’다. 세종이 내린 글귀. ‘비가 내렸으나 반은 맑고 반은 흐리니 민심도 그에 따르는구나’ 이에 김필이 답한다. ‘날이 저물며 비록 구름이 일었으나 달이 돋아오르니 걱정할 것이 없다.’ 김필의 답이 걸린 주련은 흰색으로 칠해져 있다. 사인정 뒤편의 바위에는 ‘제일강산(第一江山)’이란 글씨가 새겨져 있다. 백범 김구가 중국 상하이(上海) 망명을 떠나던 길에 사인정에서 하룻밤을 묵어가면서 남긴 글씨라고 전해진다. 사인정 아래 마을에서 만난 노인들은 “백범이 해방후 1948년 장흥국민학교에서 열린 총선거 유세에서 사인정에서 머물렀던 추억을 이야기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 정성으로 지켜온 동백정과 효를 들여다보는 용호정.
장흥 땅을 흘러가는 탐진강 하류의 정자가 사인정이라면 가장 상류의 정자가 동백정이다. 동백정이 자리잡은 자리는 세조때 좌찬성까지 올랐던 김린의 것이되, 정자는 그 후손이 지은 것이다. 김린은 단종 폐위후 정치적 혼란기에 모함을 받아 장흥부사로 좌천됐다가 스스로 은퇴하고 이곳에 은거했다. 그리고 120여년 뒤 후손이 김린의 집터에 정자를 지었다. 김린이 생전에 뜰에 심었다는 동백나무가 어찌나 아름다웠던지 동백정이란 이름을 붙여줬다고 전해진다. 우람한 노송들이 그득한 동백정 뒤편 마당에 아름드리 동백나무가 한 그루 서 있다. 애초에 그 동백나무는 아니겠지만, 어찌나 당당한지 한눈에도 수령이 적어도 100년은 넘어 보인다.
동백정은 다른 정자와는 좀 다르다. 마루는 반들반들 윤이 나고 곳곳에는 쓸고 닦으며 보살핀 흔적이 역력하다. 마루 한쪽에는 잘 짜진 멍석도 깔려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정자는 60년 전까지만 해도 마을 서당역할을 했단다. 지금도 시제를 모시는 사당으로 사용하고 있다. 그저 두고 보며 모셔놓은 것이 아니라, 실제로 쓰면서 다듬어온 세월이다. 그래서일까. 정자 안은 정갈하고 사람의 흔적으로 푸근하다.
동백정이 탐진강의 지류를 끼고 있다면 용호정은 탐진강 본류의 상류에 있다. 용호정이 선 곳은 강변의 깎아지른 벼랑. 정자로 드는 길은 한쪽이 위태로운 낭떠러지라 철제난간까지 세워져 있다. 찾아가는 길도 쉽지 않다. 정자는 분명 강을 보고 섰는데, 강 건너편 쪽에 서도 좀처럼 정자가 보이질 않는다. 숲에 묻혀 있는 까닭이다. 지도를 받아들고도 어지간한 눈썰미로는 찾아가기 힘든 곳이다. 어찌 이런 곳에 정자를 지었을까.
그 연유는 정자를 지은 뜻을 살피면 알게 된다. 용호정은 다른 정자와는 사뭇 다르다. 대개 정자들이 풍류를 위한 곳이거나 강학의 공간으로 쓰이지만, 용호정을 관통하고 있는 것은 바로 ‘효’다. 용호정은 1828년 최씨 가문의 아들 사형제가 지었다. 건너편 기역산 자락의 할아버지 묘에 3년동안 하루도 거르지 않고 매일 세 번씩 하루 30리를 걸어 성묘를 하던 아버지를 위한 것이었다. 정자를 지은 아들은 아버지를 위해 벼랑 아래에 배를 매어두고 배를 타고 성묘를 다니도록 했고, 거문고와 바둑판을 정자 위에 갖추어 놓기도 했단다. 네 아들 중 장남인 최규문은 용호정을 지은 뜻을 담은 글인 ‘용호정서(序)’에서 “풍광과 경치는 내가 취했던 바 아니다”고 썼지만, 초록의 숲 사이에 감춰진 정자의 은밀함과 정자에서 숲 사이로 탐진강을 내려다보는 맛은 더없이 빼어나다.
이곳 말고도 장흥에는 탐진강 물길을 끼고 부춘정과 창랑정, 경호정, 영귀정, 독취정 등의 정자가 늘어서 있다. 더러는 누추하고, 더러는 쇠락하거나 손을 대서 옛맛을 잃은 것들도 있지만, 저마다 몇가지 이야기씩을 담고 있는 곳들이라, 보물찾기 하듯 하나하나 짚어가며 찾아가는 여정도 썩 괜찮을 듯싶다.
장흥 = 글·사진 박경일기자 parking@munhwa.com
가는 길
호남고속도로를 타고 동광주나들목으로 나와 광주외곽순환도로에 올라서 29번 국도를 타고 화순 쪽으로 빠진다.
화순읍을 지나 이양면소재지에서 장평 쪽으로 우회전한다. 다시 유치 방면 이정표를 보고 우회전해 가다보면 장흥댐 쪽으로 내려가는 23번 국도를 만난다.
장흥에서 상선약수마을은 읍내에서 가까워 쉽게 찾아갈 수 있다.
탐진강변의 정자는 찾아가기 쉽지 않다. 내비게이터가 장착돼 있다면 주소를 쳐서 찾아가는 것이 최선이다. 사인정은 장흥읍 송암리 산 359번지, 동백정은 장동면 만년리 707번지, 용호정은 부산면 용반리 530번지다.
묵을 곳
장흥에서는 우드랜드나 휴양숙박시설을 이용하거나 상선약수마을에서 민박을 하는 것이 최선이다. 천관산에도 자연휴양림이 있지만, 숙박동의 수가 적은 데다 비포장길로 8㎞쯤을 들어가야 하는 깊은 숲에 들어서 있어 불편하다. 읍내에도 시설이 괜찮은 몇 곳의 모텔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