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해질녘 탱고/ 장대송 :: 록키의 나만의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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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질녘 탱고/ 장대송


산 넘어가는 해를 보는 노인의 눈 속에, 지난해 옮겨 심은 대추나무가,
늙은 대추나무가 대추 하나 달지 못하고 몸살을 않는다
대추나무 가지에, 거미줄이 쳐져 있고, 거기 매달린 잠자리 앞에서 거미가 탱고를 추고 있다

노을이 흔들린다, 흔들리는 노을을 잡기 위해 구절초 꽃을 바라본다.
이 자리에 내년에도 노을은 무성할까

추암해수욕장 촛대바위에, 저녁 햇볕을 주체할 수 없어, 젖가슴이 한쪽만 있거나,
애꾸눈인 과부의 허벅다리를 생각하다가 술취한 어부가 썰어준 회를 집으려는데,
젓가락이, 주책없는 젓가락이, 뽀얀 속살을 보더니, 탱고를 추고 있다

 

- 시집『스스로 웃는 매미』(문학동네,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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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는 가장 낮고 가장 깊은 곳에서 가장 높은 신음을 자아내는 고통의 목소리이다. 그 소리는 즐거운 고통이면서 괴로운 기쁨이기도 하다. 이 시대에 시를 쓴다는 사실이 왜 이다지 외롭고 힘겨울까. 끊임없이 현실과 부딪치면서 세상과 불화하고, ‘산 넘어가는 해를 보는 노인의 눈’을 연민하고, 대추나무의 몸살을 함께 애닮아 하고, 거미줄에 매달린 잠자리를 안타까이 여기면서도, 거미의 탱고를 의젓한 자세로 감상하는 다중인격자. 그러면서 ‘흔들리는 노을을 잡기 위해 구절초 꽃을 바라’보는 물기 어린 감성.

 

 ‘내년에도 노을은 무성할까’ 노인의 염려를 떠받드는 척 하더니 이런, ‘젖가슴이 한쪽만 있거나, 애꾸눈인 과부의 허벅다리를 생각하다가’ ‘주책없는 젓가락이, 뽀얀 속살을 보더니’ 뭐 어쨌다고, 탱고를 춘다고? 허리를 팍 꺾었다는 의미일까. 하지만 여기에 탱고를 갖다 붙인 이유는 도무지 모르겠다. 탱고가 무엇인가. 19세기 말 부에노스아이레스의 한 항구에서 고향을 등진 가난한 유럽 이민자들 사이에서 태어난 춤 아닌가. 밤만 되면 땀에 전 작업복을 벗어던지고 화려한 정장으로 갈아입은 부두 노동자들이 반도네온에 맞춰 춤을 추며 여인을 유혹했던 탱고.

 

 탱고는 시작부터 그렇게 유혹의 춤이었다. 남자에 비해 여자가 턱없이 부족했던 이민 초기, 탱고는 남성다움을 과시하는 수단이었다. 지금은 남미 문화의 상징이 된 탱고는 영화 ‘여인의 향기’에서 알 파치노가 멋진 탱고를 선보인 후 그 인기가 더욱 증폭됐다. 잠깐 영화 이야기를 하자면, 이 영화엔 제목과 달리 여인의 향기는 없다. 부유한 퇴역장교지만 앞을 보지 못해 자살여행을 떠나는 남자와 명문 고등학교에 다니는 가난한 한 여인의 이야기를 통하여 삶의 참다운 가치는 돈도 명예도 사회적 명성도 아닌 서로 의지할 수 있는 사람과 사람간의 순수와 용기이며 그것이 곧 사람의 향기임을 말하고 있다.

 

 이런 말이 나온다. "탱고를 추는 것을 두려워 할 필요는 없어요. 인생과는 달리 탱고에는 실수가 없고 설령 실수를 하여 발이 엉킨다 해도 다시 추면되니까. 눈을 감고 춰도 되는 춤이 바로 탱고랍니다" 하지만 남녀 간의 호흡이 중요해 탱고를 ‘하나의 심장과 네 개의 다리’라고도 표현한다. 또한 탱고는 춤추기 전 미리 눈빛으로 의사를 주고받는 것이 기본 매너이다. 그러기 위해 강열한 눈빛이 필요하고, 그 눈빛은 붉은 노을을 닮았다. 매혹의 색, 붉음이 저만치 타오르고 있다.

 

 그러고 보면 탱고는 노을과 가장 잘 어울리는 춤이다. 그러나 아르헨티나에서는 노을을 볼 수가 없다. 해가 지자마자 곧장 캄캄해져 노을이 아예 생기지 않는다. 가끔 여행자들의 사진에서 배경으로 얇은 노을을 보기도 하는데 사람의 눈으로는 볼 수 없는 노을을 카메라의 예민한 눈이 감각한 결과일 뿐이다. 그렇게 노을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오히려 탱고가 기승했는지도 모른다. 아르헨티나에는 어느 나라보다도 노을에 대한 시와 노래가 많듯이. 그것은 아마도 노을이 없다는 사실에 대한 결핍과 그리움 때문이리라. ‘해질녘 탱고’는 상상만으로도 멋지다. 노인의 눈 속에 비친 노을이 장엄해지려면 탱고 음악 하나는 깔려야겠다.

 

 

권순진

 

 
여인의 향기 OST 'Por Una Cabeza'간발의 차이

출처 : 詩하늘 통신
글쓴이 : 제4막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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