맞선을 보며/ 윤종남
풀빛 예감을 안고 약속 장소로 나간다
잠실 호텔 커피숍, 잘 익은 불빛 아래
시간의 강물 거슬러 한 길 사람 속을 더듬는다
산이 커야 골이 깊다던 아버지의 말씀
서투른 몸짓으로 살아온 세월이기에
휘어진 울타리 속에서 잣대를 들어본다
솔밭에서 바늘을 찾는다 했던가
세상 하나 보지 못했던 내 안의 흐린 기억
커피 향 가슴에 녹이며 낯선 나를 돌아본다
- 시조집 『겨울 귀소』(시선사,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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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엔 달성고등학교가 있다. 이 학교 출신의 한 청년이 맞선 자리에서 자신의 출신학교를 말하게 되었다. “저는 달고 나왔습니다만” 그러자 포항출신 맞선녀가 잠시 당황한 표정으로 살짝 얼굴을 붉히더니 이렇게 말했다. “예, 전...째고 나왔는데요.” 감히 단언컨데 시는 이런 여성이 써야 한다.
엊그제 54년생 홍준표 한나라당 대표가 라디오 시사토론프로에 나와 대학시절 첫 미팅의 쓰라린 일화를 소개했다. "당시 제가 나온 영남고는 대구의 33개 학교 가운데 30번째쯤 되는데, 경북여고 나온 이대생이 출신고를 물어보더니 바로 일어나서 집으로 가버립디다“ 정치인의 솔직담백한 모습은 확실히 매력이자 미덕이다.
‘풀빛 예감’의 설렘과 긴장으로 맞선자리에 나가기는 하는데, 이게 실은 엄청난 부담이 아닐 수 없다. ‘시간의 강물 거슬러 한 길 사람 속을 더듬는’자체가 쉽지 않거니와, 상대는 단점이나 숨기고 싶은 이력들을 적당히 감추려할지도 모른다. 그래서 외모, 옷매무새, 표정, 말씨, 사소한 습관, 몸동작 하나하나까지 속속들이 입력시켜 검열과 평가를 거친 다음 스캔한다.
하지만 짧은 만남에서 상대에 대한 많은 정보와 속마음을 알기란 ‘솔밭에서 바늘 찾는’것이나 진배없다. ‘산이 커야 골이 깊다던 아버지의 말씀’은 품은 뜻이 높아야 생각도 깊다는 뜻이겠는데, 이는 자신의 잣대를 높이라는 뜻인지 상대가 그런 사람인가를 살피라는 의미인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외모와 첫인상에 꽂힌 직관은 자주 배반당하고 만다.
그리고 맞선은 일방통행이 아니다. 자신이 조건을 따지면 상대도 그만큼 원한다. 자리에 앉자마자 "사진하고 다르네요." "키가 생각보다 작으시네요.“이런 말을 함부로 하는 여자나, 용모가 제 맘에 차지 않는다고 “바빠서 이만…”하고 먼저 일어서는 몰상식한 남자는 맞선시장에서 퇴출되어야 마땅하다.
시인은 문득 상대를 저울질하고 재단하는 ‘낯선 나를 돌아보’면서 좋은 짝을 만나기보다는 좋은 짝이 되는데 힘쓰라는 잠언과 더불어 '세상 하나 보지 못했던 내 안의 흐린 기억'을 떠올리며 들고있던 자를 슬그머니 내려놓는다. 당장 사랑의 화살은 관통하지 않았을지라도 좋은 짝이 될 가능성은 그만큼 높아졌으리라.
권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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