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텔에서 / 김백겸
카운터에서 방의 예약을 확인했다
열쇠를 받아 엘리베이터를 타고 긴 침묵을 타고 올라갔다
복도에 내려 무심코 방문을 열었더니
당신 하고 부르는 여자
아빠 하고 달려드는 아이들
내가 모르는 사람들이 미리 도착해서 짐을 풀고 있었다
카운터아가씨가 방 배정을 실수했을까?
내가 엘리베이터 층 번호를 착각했을까?
모든 운명이 변한 풍경을 꿈이 제 스스로 알아서 찾아왔는데
찬물을 뒤집어 쓴 현실이 아직 정신이 안 돌아왔나?
천관녀를 찾아온 김유신의 말이며
이정표를 잘못 본 고속도로상의 자가용이었지만
회차를 할 수 있는 출구는 아직 한참이나 남아 있었다
이 생에서는 하늘이 잘 보이는 방에 묵을 예정이었다
착각이 거리의 빌딩과 간판이 화려하게 늘어선 방에서 묵게 하였다
스카이라운지에는 언제나 올라갈 수 있을지
아득한 시간이었다
벌레 환상 / 김백겸
세금고지서가 배달되었다
인쇄된 벌레들이 내지갑을 갉아먹었다
시집이 저자의 사인과 함께 배달되었다
책 속에서 대오를 정비한 벌레들이 내 사유와 감정을 뜯어먹었다
이메일에 연구소의 공지사항과 현안문제가 배달되었다
전기를 먹은 벌레들이 눈으로 기어 들어와
뇌 속 신경회로를 헤집고 돌아다녔다
몸이 벌레의 횡포에 반역을 일으켰다
벌레가 물어다주는 먹이를 거부하고 벌레의 관심을 경멸했다
벌레의 도움 없이 홀로 살아갈 자유를 꿈꾸었다
벌레가 없는 사막으로 들어가 하늘과 땅의 기운으로
몸을 부양하고자 했다
벌레보다 현명한 지혜와 깨달음으로
벌레의 도움 없이 바벨탑을 세우고자 했다
그러나 벌레가 이룩한 기표의 제국, 문명의 감옥에서는
벌레들이 설치한 감시카메라가 하늘의 별처럼 총총했다
벌레들이 권력과 성과 명예의 이름을 보여주었다
벌레들이 불멸의 진리를 보여주기도 했다
벌레들이 빛나는 금강벌레가 되어
환상의 새끼를 낳고 또 낳았다
캄캄한 어둠에서 일어나니 내 어머니는 바로 벌레
시간의 자궁에서 탯줄을 끊었을 때
배고파 떠나갈 듯 울던 내 정신에 젖꼭지를 물린 존재는 바로 벌레
기쁠 때나 슬플 때나 내 눈을 들여다보고 문화의 요람으로
데리고 간 팔은 바로 벌레
죽어야만 벌레로부터 벗어난다고 가르쳐준 것도 바로 벌레
- 현장비평가가 뽑은 올해의 좋은 시 2006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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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백겸 시인
대전 출생
1983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기상예보' 당선
시집
「비를 주제로 한 서정별곡」
「가슴에 앉힌 산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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