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6월7일
주희에게서 메일이 왔다.
나를 보러 다음달 초에 하와이에 오겠단다.
한국에 있는 내 친구들에게 내 행방을 수소문했나 보다.
난감했다.
전혀 기뻐할 수가 없었다.
불법체류자 신분으로 이 주 저 주를 전전하며 하루하루를 숨죽여 살아 가는 나.
밤이면 온갖 여자들에게 술을 따르며 내 영혼과 젊음을 팔고 있는 나.
그리고 나는 지금 세상에서 버려진 한 여자와 동거중이다.
나는 더이상 예전에 그녀가 기억하던 그 남자가 아니다.
내 육체도 내 영혼도 모든 것이 변해 버렸다.
반면 그녀는 모든 것이 나와 정반대의 입장이다.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 평생 아무 걱정없이 살아 온 그녀.
유학까지 온단다.
그녀와 나사이에는 이제 건널 수 없는 너무도 큰 강이 하나 생겨 버렸다.
예전부터 사실 난 그녀에게 알 수 없이 많은 자격지심이 있었다.
가끔씩 너무도 판이한 환경에 일말의 가당치 않은 분노같은 것을 느낄 때도 있었다.
그런 모든 상황들이 마치 낡은 영화필름처럼 주루루룩 내 우뇌를 거쳐 좌뇌까지 흘러가자 많은 감정들이 일순간 교차했다.
본심중의 본심은 보고싶다,만나고 싶다,그녀를 다시 한번 안고 싶다.
하지만 그러면 도현이는?
그렇게 사랑한다고 울부 짖었던 도현이와 보냈던 그 세월은 정녕 다 거짓이였나?
나는 정말 악마인가?
도대체 나는 누구인가?
평생 이런 문제에 양심의 가책을 느낀 적이 한번도 없었다.
그런데 참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업을 하고 있으면서 갑자기 이런 말도 안되는 갈등은 도대체 뭐란 말인가?
주희에게 또 원망이 생겼다.
왜 날 다시 이런 지경으로 몰아 넣는 건지.
그동안 그만큼 힘들게 했으면 됐지,지금 잘 살고 있는 나에게 왜 또 이런 힘든 시간을 던져 주는 거야.
2004년 6월10일
불면의 나날들이다.
어제는 아버님 생신이셨는데 전화도 드리질 않았다.
오는 전화도 하나도 받질 않았다.
그저 숨고 또 숨어 있고 싶다.
내 모든 상황들이 그리고 너무도 추악한 내 자신이 혐오스러워 견딜 수가 없다.
구역질이 난다,나라는 인간.
모두에게 거짓말이다.
어머니께 드리는 거짓말,도현이에게 하는 거짓말,주희에게 하는 거짓말,모든 손님들에게 하는 거짓말.
나는 십중 인격자인가?
자아분열이 너무도 심하다.
2004년 6월11일
도현이가 거의 한달만에 집엘 들어 왔다.
지난 삼월에 가게를 오픈한 이후 계속 이런 사이클이다.
그런데 꼭 생리기간에만 집엘 온다.
미쳐 버리겠다.
나는 도대체 누구인가?
나는 도대체 그녀에게 무엇을 바라는 것인가?
자꾸만 자꾸만 그 누구도 아닌 나 자신에게 진실을 호도하려 눈을 감아 버리고 고개를 좌우로 돌려 버리는 나란 인간.
도대체 왜 이렇게까지 썩어 문들어져 버린 건가.
왜 나는 도현이와 함께 사는 것일까?
그리고 과연 이게 같이 사는 것인가?
나는 정말 그녀를 사랑하는 것일까?
그녀 얼굴을 보는데 자꾸만 주희 얼굴이 오버랩되었다.
2004년 6월12일
오랫만에 그녀가 차려 준 밥을 함께 먹다가 도현이에게 물었다.
날 사랑하느냐고.
그녀는 그저 나를 바라 보며 한번 빙긋 웃어 주었을 뿐이다.
목소리를 조금 높여 다시 물었다.
정말 나를 사랑하긴 사랑하는 거냐고.
또 대답이 없이 수저를 놓고 의아한 듯 나를 물끄러미 바라 보는 그녀.
나는 그순간 상을 엎어 버리고 온 집안 물건들을 다 때려 부셔 버렸다.
2004년 6월13일
또 혼자가 되었다.
견딜 수가 없이 외롭다.
시간이 흐르면 흐를 수록 근원도 행방도 알 수 없는 분노가 자꾸만 자꾸만 내 온 몸을 휘감아 왔다.
홧김에 주희에게 메일을 보냈다.
보고 싶다고,언제 오냐고,내가 마중을 나가 겠다고 말이다.
뭐가 어떻게 돌아 가는지 모르겠다.
뭔가 큰 나쁜 짓을 한건 아닌지 자꾸만 심장박동이 빨라 진다.
눈을 감아 버리면 더 잘 외면할 수 있을까.
난 그 자리에서 두 눈을 질끈 감아 버렸다.
그리고 한동안 감은 눈을 뜰 수가 없었다.
2004년 6월14일
그게 잘사는 거라고 배웠다.
내 양손에는 최대한 많이 움켜 쥐어야 한다.
그리고 언제 배신당할지 모르니 내 마음은 꽁꽁 닫아 두어야 한다.
겉으로는 넉넉히 웃어 주고,속으로는 언제나 철저히 계산을 하여 한방울도 손해보지 않아야 된다고 배웠다.
늘 남의 것을 탐하면서도 표시내지 말고 성인군자인척 하라고 배웠다.
그리고 대열을 넘어 가면 이단아이니 철저히 비난하라고 배웠다.
우리와 다르게 생겼으면 철저히 무시하고 침을 뱉으라고 배웠단 말이다.
이 모든 것들이 내가 태어나서 자란 그 곳에서 배운 것들이다.
그리고 내가 아는 그곳에 사는 모든 인간들은 다 이렇다.
2004년 6월19일
제프리가 드디어 돌아 왔다.
너무너무 반가워 눈물이 다 날 지경이다.
뭔가 모르게 한층 더 성숙해진 느낌.
이 녀석도 큰 강 하나를 건너 온 것 같다.
2004년 6월22일
도현이에게서 전화가 왔다.
2주일 정도 샌프란시스코 언니네 집에 다녀 온다고 한다.
완벽한 타이밍이다.
주희는 7월2일경에 온다고 했다.
2004년 6월30일
이 집에서 모든 도현이의 흔적을 지웠다.
그녀의 모든 물건을 박스에다 차곡차곡 정리해 옷장속에 고이 모셔 두었다.
완벽하다!
2004년 7월2일
공항에서 난 주희를 한 삼십분동안 꼭 끌어 안고 놓아 주지를 않았다.
그녀도 나도 자꾸만 자꾸만 뜨거운 눈물이 흘러 내려 서로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당시 나를 떠나간 이유를 울먹이며 계속 설명하려 했고,나는 괜찮다며 괜찮다며 내 입술로 그녀의 입술을 덮어 버렸다.
금방 온 몸이 땀으로 범벅이 되어 버렸다.
찝찝한 재회다.
to be contin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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