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5월1일
지난 밤 한 삼백번은 가위에 눌린 것 같다.
도저히 잠을 잘 수 없는 지경이다.
아,이렇게 사람이 미치는 거구나.
자꾸만 다른 세상으로 달아 나려는 내가 느껴 지니 섬뜩했다.
2003년 5월2일
말똥이 널부러진 비치를 걷고 있는데 대학생쯤으로 보이는 두 미국 청년이 내게 다가와 길을 물어 본다.
덥수룩하게 자라버린 수염탓일까?
어이가 없어 푸하하 웃음이 나왔다.
2003년 5월4일
드디어 브로커가 내려 왔다.
나는 너무도 반가운 마음에 그를 보자마자 털썩 주저 앉아 버렸다.
하지만 그가 남긴 말은 몇일만 더 참아 보란다.
주먹을 날릴 뻔 했다.
여권은 지금 작업중이고,2~3일 내로 아리조나쪽으로 출발할거라 한다.
이제 샌디에고 국경을 사용하지 않기로 했단다.
얼마전에도 멕시칸들이 스무명정도 적발이 되어 경계가 살벌하다고 했다.
그리고 그가 내민 담배종이에 굵게 말린 마리화나 한개피.
나는 그게 어떤 건지도 모르고 스스럼없이 받아 들어 거리낌없이 입에 물었고,그가 돌아 간뒤 난 꼬박 하루를 침대에서 뒹굴어야 했다.
도깨비는 보이질 않았지만 호된 첫경험이였다.
2003년 5월9일
태어나서 이런 차는 처음 타 보았다.
캐딜락이라고 했다.
미국에서 캐딜락을 타는게 어떤 의미인지 아냐며 어깨를 거들먹거리는 브로커.
잘 모른다.
부끄럽다.
그리고 움직임이 자꾸만 조심스러워 졌다.
그렇게 브로커와 함께 단 둘이서 아리조나 빨간 바위산 속을 열몇시간인가를 달리고 달렸다.
나는 인상이 좋아 미국에서 잘 먹힐 것 같단다.
그 지푸라기같은 칭찬 한마디에도 감동이 밀려 왔다.
이제 어서 그 꿈의 미국이라는 땅덩어리를 제발 한번 간절히 간절히 밟아 보고 싶다.
2003년 5월10일
드디어 드디어 한국을 떠난지 한달여만에 천사들의 도시 Los Angeles 입성.
너무 기다렸던 탓인지 내가 이곳에 와있다는 사실 자체가 믿기질 않는다.
고생했다며 브로커와 나눈 그 진한 포옹.
나는 어색해 하는 그를 아주아주 꼭 안아 주었다.
한인타운에서 오랫만에 따뜻한 밥 두공기를 허겁지겁 비우고 나니 그동안의 긴장이 모두 풀린다.
계산서가 나오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내가 오늘부터 일할 호스트바의 조폭처럼 생긴 사장이 대순형과 함께 식당으로 들어 섰다.
그렇게 나는 브로커에게서 그들에게로 인수인계가 되었고 숙소가 있다는 Newhampsher로 이동을 하였다.
도로변에 쭉 늘어선 Palmtree도 그렇고 태양의 채도와 명도까지 모든 것이 새롭다.
심장이 뛴다.
무언가 좋은 일들만 생길 것 같다.
나는 드디어 기회의 땅 미국에 도착했다!
2003년 5월17일
일주일째 초이스를 단 한번도 받지 못했다.
가게는 오픈가게라 손님이 미어 진다.
하루에도 세네번의 초이스.
항상 마지막에 남겨지는 나.
그 모든 초이스에서 단 한번도 선택받지 못한 것이다.
그렇게 그렇게 자신이 있었는데 점점 초라해지는 내자신이 너무도 징그럽다.
창피해서 미쳐 버릴 것 같다.
숨마저 가빠 온다.
마지막의 마지막 희망.
그 남은 불씨마저 사그려 들려 한다.
거울을 본다.
꽤 괜찮다.
아닌가..조금 뚱뚱한가?
아니,아직까지는 괜찮아.
머리가 많이 짧은가?
레옹 스타일이니까 이렇게 짧지 뭐.
평생 쓰고 있는 분신같은 안경을 벗어야 하나?
아니야,지적인 이미지라 괜찮아.
나는..이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혹시 내가 나에게 내리는 평가는 오직 나만의 착각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답답함이 두려움이 명치 끝까지 치밀어 올라 얼굴이 뜨겁게 달아 올랐다.
그런데 혹시 진실은 이미 나도 알고 있지 않았을까?
뭔가 큰 폭풍을 만난 느낌이다.
이를 악물고 버티는 내 속의 그 놈이 느껴졌다.
갑자기 멕시코에서 처음 접한 그 마리화나라는 것이 피고 싶다라고 생각했다.
그저 끝임없는 이 지옥같은 현실을 벗어 나고 싶다라는 생각과 함께.
2003년 5월19일
제프리라는 새로운 식구가 달라스에서 오늘 왔다.
사장형의 동생이라는데 잘 나가던 갱출신이라고 한다.
힙합하는 뮤지션같은 차림에 한국 조폭하고는 완전 느낌 자체가 틀렸다.
-뭐 표정은 비장미가 철철이였다.-
한국말도 잘 못하는 이 친구와 나는 숙소에서 같이 한방을 쓰게 되었다.
첫날부터 삐걱삐걱 작은 기싸움들.
힘들다 힘들어!
2003년 5월20일
뉴 햄프셔.
이 동네 정말 끝내 준다.
우리 숙소는 랄프라는 마켓뒤 멕시칸 밀집지역 아파트 지구인데 매일밤 헬기가 뜬다.
그리고 끊임없는 싸이렌 소리.
최고의 환경이다.
영화에서 보던 그대로다.
2003년 5월24일
매일 밤 온 집안 물건을 다 때려 부수는 대순형의 엄청난 주사를 견뎌 내야 한다.
괴로워 미칠 것만 같다.
어렸을 적 아버지의 술취한 모습이 그렇게 싫어 울며 불며 도망만 다녔는데 이번에는 빼도 박도 못하는 현실이다.
제대로 딱 걸렸다.
악몽같은 나날들이다.
2003년 5월25일
그동안 전혀 소식을 알 수 없었던 두 동생에게서 `도와주세요 (대필-황사주)'라는 제목으로 메일이 왔다.
형 보세요. 우리 (정대, 동석)는 지금 여기 샌디에고 MMC라는 이민국에 수감되어 있습니다.
그 때 우리랑 같이 있던 사람 (Sam Lee)의 증인을 서야 한다는 군요.
여기서 말하기를 우리 둘은 밀입국 죄도 아니고, 아무런 죄도 없답니다.
그 사람 재판때까지는 3~4개월,그때까지 이곳에 있던가,아니면 보석금을 내어야 L.A로 갈 수 있답니다.
단 합법적으로 미국에 거주하는 사람으로 보증인을 구하면, 우리는 이곳에서 출소할 수 있답니다.
형 이글을 보시는 데로 변호사와 같이 통역하러 오신 황사주씨(858-486-0258)에게 빨리 연락 주세요.
그리고 형 연락처도 이분에게 가르쳐 주세요.
그래서 바로 우리가 연락할 수 있도록요.
형 여기 생활 하루 하루가 악몽입니다.
여긴 감옥보다 더 합니다.
아래 주소가 우리가 있는 곳입니다.
이리로 답장 보내 주세요.
제 패스포트도 챙겨놔 주세요 꼭!
87766-198. Jeong Dae Seo
D-Unit, 4th Floor Rang 5
Metropolitan Correctional Center
808 Union Street
San Diego, CA 92101
지금 동석이와 정대가 샌디에고 MMC라는 곳에 수감이 되어 있다고 한다.
조속한 석방과 귀국을 위해선 USD1,5000의 보석금이나 영주권자 이상의 보증인을 서둘러 구해야 한다고 한다.
그저 이 놈들의 지금 신변을 확인한 것만으로 일단 꽉 막혀 있던 가슴 한켠이 뻥 뚤린 것 같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수많은 걱정들이 물밀 듯이 밀려 온다.
돈도 돈이다.
그리고 처음 밟은 이 미국땅에서 도대체 어떻게 보증인을 찾을 수 있단 말인가.
일단 시민권자라는 제프리에게 안되는 영어로 손짓/발짓으로 상황을 설명했다.
하지만 그는 그럴 수 없다라고 했다.
이유는 녀석도 달라스에서 무슨 사고를 치고 지금 도피중인 상황이라는 것이다.
아쉽고 섭섭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렇게 다시금 명치 끝이 꽉 막혀 왔다.
2003년 5월28일
오늘 오후 도착한 그들의 두번째 메일.
2003/05/28 14:27
형보세요.
우리(정대,동석)는 여기 센디에고 MMC에 지금 수감중입니다.
지난번 같이 잡힌 브로커(SAM Lee)의 증인이 되어야 한답니다.
밀입국 죄도 아니고 우린 아무런 죄가 없다고 하네요.
다만 증인으로서 여기에 있어야만 한답니다.
재판까지는 3~4개월 정도가 걸리는데 미치고 환장할 노릇입니다.
여긴 감옥입니다!
형 도와주세요.
우리가 여기서 나갈려면 보증인이 와야 합니다.
시민권자,영주권자,비자만 있어도 여기 와서 싸인만 하고 우릴 데리고 나갈 수 있답니다.
형!!!
이 메일을 보는데로 우선 답장 주세요,빨리요.
우리 통역관이랑도 바로 통화해야 합니다.
SEO JEONG DAE-87766-198
(alisha han .한상희. 619-252-4650)
KOO DONG Suk -87866-198
chan i .charles . hwang 619-977-2246
우리들 통역관이랍니다.
이사람들과 먼저 통화하고 오세요.
METROPOLITAN CORRECTIONAL CENTER 808 UNION STREET SAN DIEGO. CA 92101 D-UNIT 87766-198 SEO JEONG DAE
오후내내 계속해서 통역사와 통화를 시도했으나 단 한번도 연결되지 않았다.
저녁 늦게서야 겨우 통화에 성공했는데 그저 기다리라는 말만 남긴다.
2003년 5월29일
사방팔방 도움을 청하고 수소문을 하여 브로커의 행방을 찾았으나 그들은 너무도 꼭꼭 잠수중이라 도저히 행방을 알 수가 없었다.
내 동생들의 패스포드와 돈과 짐을 모두 들고 잠수를 탄것이다.
온 몸이 바짝바짝 타들어 가는 느낌이다.
2003년 5월30일
영사관 변호사에게서 메일이 왔다.
2003/05/30 03:05
저는 서정대씨의 연락을 받은 영사관의 최재형 변호사 입니다.
서정대씨가 연락을 취하고 싶어 하는데 전화 연락처를 남겨 주십시오.
제 전화번호는 213-38*-9300 내선 64번이니 음성녹음으로 전화 번호를 남겨 주셨으면 합니다.
영사관 고문 변호사라고 한다.
아무리 전화를 해도 연결되지가 않는다.
그렇게 수없는 구원의 음성녹음만을 남겨야 했다.
2003년 5월31일
보증인 구하기가 하늘에 별따기이다.
이곳저곳 알아보지 않은 곳이 없다.
고개를 숙이며 제발 한번만 도와 달라고 빌어 보았지만 한결같이 모두 다 곤란하다라는 대답뿐이였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마지막으로 영사관 홈페이지에 접속해 도움을 청했었는데 그 회신은 이랬다.
2003년 05월 31일 낮 2시 41분 50초 -0700 (PDT)
영사관은 미국의 주민이 아니라 한국정부를 대표하기때문에 이 상황에서 보증인으로나 보증인을 찾는 일을 도와드릴 수 없음을 알려 드립니다.
나성 총 영사관 법률고문
최재형 올림
to be continue..
'책·여행·사랑·자유 > 자유 Freedom'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I MUA I KA NOA-4 (0) | 2009.12.14 |
---|---|
[스크랩] I MUA I KA NOA-3 (0) | 2009.12.14 |
[스크랩] I MUA I KA NOA-1 (0) | 2009.12.14 |
[스크랩] Prologos (0) | 2009.12.14 |
우연 그리고 인연..(11월 마무리 잘하시고 행복한 12월 맞으세요~) (0) | 2009.12.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