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 인제' 태그의 글 목록 :: 록키의 나만의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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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깔끔하게 설겆이를 마친 인민군의 확인(?) 사살

 

 

 

 

 

 계곡 입수를 뜻하는 저 포즈대로 결국 록키는 계곡 입수를 감행하고

 

 

 

 

 

 누군가 쌓아 놓은 돌탑 사진

 

 멀리 물가에 인민군이 보이고

 

 록키도 V를 그리며 물가에 섰는데

 

 결국 귀얇은 록키는 다른 멤버들의 독촉에 계곡입수를 감행하고

 

 한여름 더위를 싸~악 가셔줄 시원한 계곡물 '한번 빠져 봅시다'....준비 운동 필수 ^^

 

 '난 못 들어간다' 왠 일로 몸을 사리시는 인민군 대장님 ㅋ

 

연희님 인민군처럼 한쪽 무릎 올리고 다시 한컷 더 찍어 봐봐~~

 

대청봉까지 아직도 5Km 이상 남아 있는데

 

록키는 이곳 저곳 신기한 버섯 사진 등을  찍느라 정신이 없고

 

 

선두는 점점 멀어져 가고

 

 

 

폭포옆에 앉은 세남매

 

록키도 옆에 가서 앉아 보는데

 

록키야 설악님 좀 잘 모시고 서둘러라~~ 근심반 걱정반 인민군 대장님 표정

 

 

내가 웃는게 웃는게 아니야~♬ 경희누님도 걱정하며 쳐다 보는데

 

 

흐~음 한잔 또 땡기는 듯한 표정의 설악님

 

 

중간에 끼어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록키...입술을 꼬~옥 깨물어 보는데

 

 

 

시원한 폭포 옆에서 한장 더 찍어 보고

 

소백산 솔로 산행 직후 감행하는 설악산 비박이라 엄청난 배낭 무게에 점점 힘들어 하시는 설악님

 

 

안되겠군 선두를 먼저 보내고 후미는 따로 떨어져서 쫒아 가야 겠군...

 

 

 

아픈 추억이 있다는 대승폭포 옆에서 설악님과 서로  한 컷씩 더 찍어 보고

 

 

 

 

 

이제 봉정암 까지는 1.6Km 정도 남았는데...

 

 

 

 

 

 

록키야 힘들다 한잔만 하고 쉬었다 가자...헉헉헉

 

아직도 갈길은 멀고

 

점점 더 어깨를 짖누르는 설악님의 배낭 무게

 

 

안되겠군 록키도 간단히 요기를 하고 설악님도 간단히 입술만 축이고 가기로...

 

 

록키는 시원한 막걸리 한잔

설악님은 이슬이 한잔

안주는 포도...^^

허기를 달래고

다시 출발

 

 

주위엔 서서히 어둠이 깔리기 시작하고 있는데

 

 

그래도 노을빛에 붉게 물들어 바위랑 주변 경관 사진은 더욱 예쁘게 나오고...

 

 

멋진 설악의 일몰...노을이 지기 시작하는데

 

 

 

설악에서 보는 멋진 해넘이

 

선두와의 거리는 30분에서 1시간 이상 벌어져만 가고

 

 

어라라~ 이럴 때가 아닌듯 앞서 간 멤버들은 점심때 모두 배낭을 비워서 식량이 없는데

 

 

봉정암 입구에 도착하니 8시가 가까워져 있었고

맛있는 저녁거리 및 반찬들은 록키등에 있었고

헤드랜턴을 차고 중청대피소로 가야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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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 be Contin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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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록키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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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지산 번개산행 이후 팀웍을 다지고 몸을 만든 멤버들은

작년 10월 이후 꾸준히 거론되어 왔었던 무모한

설악산 비박 번개산행을 감행하였다.

 

집합 장소는 석계역 1번출구

집합시간은 아침 7시반

 

멤버는 5명 !!!

인민군,설악님

경희누님

연희님

 

 아침은 홍천강 인제 입구인 "언덕빼기" 에서 해결

 

 전날 동창모임으로 과음한 인민군의 해장을 위하여 메뉴는 청국장...가운데가 주인장 언덕빼기님

 

 록키도 가운데 끼어서 한창

 

 정말 속 시원한 청국장 해장국 그리고 계란 후라이 ㅋㅋ

이후 풋고추랑 야채 맛을 본 멤버들은 뒷밭을 습격

 

 연희님 거기 풋고추도 좀 따 봐봐~~

 

 각종 쌈들을 초토화 정리시키는 만행(?)을 저질렀다 ^^

 

 꽃만 보면 사죽을 못쓰시는 허경희 부회장님

 

백담사 올라가는 버스안에서 설악님과 경희부회장님

인민군과 연희님

막차는 6시...다음날 막차 시간을 맞추기 위하여 록키는 죽을 힘을 다해 달렸다는...ㅋㅋ

설악산 국립공원 백담분소 입구

한대만 간신히 지나갈 수 있는 길이어서 서로간에 긴밀하게 통신과 대화를 하며 오고 가는 모습

버스에서 하차하여 백담사로 오르는 설악님

백담사 입구 계곡의 맑은 물을 보며 한컷

 

산행 시작전 금강문 입구에서 한장 더

 

조오현 님의 시비 "아득한 성자"

 

웨이크 보드 모터 보트의 뒷모습을 연상케 하는 거대한 물보라

 

기대감과 긴장감으로 첫 발걸음을 떼고

설악님의 배낭을 꼼꼼히 챙겨주는 선두 인민군

인민군의 포스

경희 누님의 포근한 미소

힘만 센 록키도 가슴에 힘주고 화이팅을 외쳐 보는데...^^

설악맨 설악님의 여유로운 미소

설레이는 기대감으로 얼굴 가득 미소를 띄우는 연희님

 

설악산 국립공원 알림 마당

 

설악산 국립공원 안내도

수렴동 휴게소 까지 가기 전 물가에서

잘 설치되어 있는 난간위를 걷고

'록키야 쉬었다 가자 목마르다' 이슬이 한모금에 행복해 하는 설악님의 미소

우리들 마음속에는 '중청에서 잘건데 뮈...' 라는 생각이 ㅎㅎ

 

물반 고기반이다 와~~

계속해서 이어지는 난간과 계단들

 

영시암 도착 전 잠깐만 부르는 내 목소리에 뒤돌아 보는 연희님과 경희누님

 

아이의 우는 소리에 가보니 아빠와 함께 올라온 두 꼬마 아이중 작은 아이가 힘들다며 보채고 있었고

 

방울 토마토와 과자로 우는 아이를 달래고 흐뭇해 하는 록키

 

'잘 했어~~ 록키야' 인민군 형님의 칭찬 ㅋㅋ

친자매 처럼 친해져서 장난도 마다않는 연희님과 경희누님

설악님의 안타까운 무표정...여긴 절이라 한잔 할 수도 없구 ㅎㅎㅎ

 

오세암 봉정암 백담사 갈림 표지판에서 한장씩 찍어주는 센스 ^^

인증샷에 나도 빠질 수 없지...록키야 이쁘게 찍어 봐봐

 

'만세' 록키도 한 컷

인민군도 인증샷

다시 배낭을 메고 출발~~~

 

 

 

맑은 계곡물과 잘 어울리는 설악님의 미소

수렴동 대피소에서 점심 식사를 하며 시원한 막걸리 한잔씩 건배 

 

땀흘리며 오리와 치맛살을 구워 주시는 인민군님...마블링 쥑인다 ㅋㅋ

 

식사후 물티슈로 깨끗하게 설겆이 및 마무리를 하고

 

백담사 입구의 고운님의 시비를 보며 1탄을 마무리 합니다...

곧이어 2탄으로 계속 이어지도록 하겠습니다...

 

To be Continue...

 

-록키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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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곡입수도 하고 일몰과 일출도 보고 밤하늘의 쏟아지는 별들

중청에서의 아름다운 하룻밤 대청에서의 일출까지 보았다는 건

순전히 록키가 복이 많다는 것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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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설악의 폭포

 아름다운 설악의 해넘이...일몰 ^^


 설악님과 록키의 일용할 양식들


 졸리운 인민군을 위한 연희님의 배려 CASS 카스 바쥬카포 ㅋㅋㅋ


 심각한 표정의 록키...웃어라 록키야 ㅎㅎㅎ


 설악산일출 연속사진 1

 

설악산일출 연속사진 2

 

 설악산일출 연속사진 3

 

 설악산일출 연속사진 4

 

 

지난번 명지산 번개로 몸을 만들고 팀웍을 다진 우리들

작년부터 계획만 세웠던 설악산 1박2일 비박 산행 감행

여기에 맛보기 사진 몇장을 간단히 모바일로 올려본다.


-록키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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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n 고운산악회
글쓴이 : 왕벌 원글보기
메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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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명에게 문자를 보냈건만 답장이 온 사람은 6명

 

참석자는 설악님과 인민군 연이님 4명

 

그렇게 우리 4명은 방태산

 

등정에 나섰다.

 

등정 지도

 

주억봉 정상 부근 사진

 

입구의 방태산 자연 휴양림 간판

 

관리사무소의 깔끔한 모습

 

출발은 가뿐하였으나 중간에 소나기가 오락가락

 

하산길 입석도 비에 젖어 있었다.

 

표지판

 

입구 계곡의 맑은 모습

 

입구의 넓은 모습

 

⑦번과 ⑧번이 우리의 목적지

 

각오를 다지며 산행을 시작하고

 

정상부근 설악님의 나른한 표정

 

못 먹어도 고 !!!

 

안정된 하체를 자랑하시는 설악님

 

 

 

 

예쁜 꽃들도 많이 있고

 

 

유난히 힘들어 하는 인민군의 모습

 

정상부근에서 사진 찍기에 바쁘신 설악님

 

맛난 도시락과 그 속에서 나온 편지의 사연

 

아~~! 부러버라 ^^

 

왕복 12~13km 의 쉽지 않은 산행길

 

다리가 불편하다던 연이님도 외피를 입으시고 땀을 한 양동이...ㅎㅎㅎ

 

그래도 주억봉 1,444M 인증샷은 기분좋게 찍어야지

 

셋이서 한방

 

넷이서 한방

 

흔들렸다 다시 한방 더 ^^

 

하산길 다리 위에서

 

다리가 아파서 인지 굳은 표정의 연이님

 

비가 와서 미끄러운 산길을 잘 내려오시는 설악님의 밝은 미소

 

그래도 록키는 밝게

 

중간에 계속 인민군이 늦었다며 전화와서 뛰느라 흔들린 사진

 

옆에 왔는데도 계속 전화질을...ㅋㅋ

 

계곡에서 설악님 땀 씻으시고 V

 

록키야 다 젖었다....좀 짜서 말려 입자 ㅎㅎㅎ

 

오늘도 후미의 록키 였습니다.

 

-록키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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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음만큼 넓고 번쩍이는 시원한 이마를 가진 나는 누구일까요?

 

희미한 사진 속 쩍벌남의 주인공은 바로 ?!?

 

흐~음 등장부터 심상치 않으신데

 

바로 바로 춘천의 명물 하이~~마빡님

 

 어린아이처럼 용감하게 타잔 흉내도 내 보시고

 

 

 얼음 다리 밑에서 분위기도 잡아 보지만

 

 뚜벅 뚜벅 한걸음씩 전진하는 나는야 마빡~~

 

 에고 힘들어 스틱에 기대어 쉬기도 해보지만

 

 뭐라고?? 록키야 잘 안들려~~

 

 아~ 빨랑 빨랑 좀 따라 오라니까~

내리막에선 아무도 따라 올 수 없는 KTX 스피드의 소유자

 

 에고 에고 또 힘들다~~ 헥 헥

 

 어~! 저 말입니까 ?!?!

 

 멋진 포즈로 뭘 하시는지 ?? ㅋㅋ

(정답은 아랫쪽 하단에...ㅎㅎㅎ)

 

 다 죽었쓰~~

 

 그래도 오르막은 역시 힘들어 !!!

 

 그래도 양반이 가오가 있지...뒷짐 지고 에헴 !!!

 

 흠~ 이제 거의 다 올라왔군 !!!

 

 큰바위 얼굴앞에서 하연님과 포즈도 취해보고

 

 록키야 똑바로 잘 찍어 보란 말이야

안 그럼 확 뛰어 내려 버린다 ^^

 

 그래서 멋지게 한 컷

 

 흠 나도 요기서 저 소나무 찍어 봐야지~~

 

 내 비록 앞니는 아직 없지만

 

 

 

 멋지게 타잔처럼 나무에도 잘 올라 가시는데

(뒤에서 누군가 타잔 아니고 치타라고 하시는...ㅎㅎㅎ)

 

 이 박쥐모양 고드름을 확 떼버려

 

 담배물고 칼질 하시는 폼이 어째 좀...^^

 

 록키야 그래도 맛만 좋다 일단 한번 먹어 봐봐~~

 

 흠 능숙한 솜씨로 삼겹살 대패질 아니 칼질을 하시고

 

 

 한발 들고 볼 일 봐주시는 센스

 

 언덕아 빨랑 좀 따라 와라...내리막 질주 해 주시는데

 

 로프도 능숙하게 잡고 내려 가시고

 

 야 인민군 같이 좀 가자~~ 뒤에서 계속 돌도 던져 보시고

 

 그래도 록키가 춘천가면 언제든 헬기타고 달려나와 주시는

 

나는야 의리의 싸나이 하~이 마빡 !!!

(진정한 우정을 보여주시는 마빡님 감사합니다.)

 

- 록키생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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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홍길 박영석 한왕용 진정한 영웅이여!

선의의 경쟁하며 히말라야 8000m급 14좌 완등

… 수많은 실패 딛고 목표 달성 인간 승리

세계 등반과 탐험의 역사를 다시 쓴 한국의 산악인 박영석, 엄홍길, 한왕용 씨(왼쪽부터).

 

벌써 5년 전 일이다. 2000년 여름, 산악인 엄홍길 씨가 K2를 끝으로 히말라야 8000m급 자이언트 봉 14개를 모두 등정하는 쾌거를 이뤘다. 이듬해엔 산악인 박영석 씨가 같은 기록을 세우고, 2003년에는 또 한 명의 산사나이 한왕용 씨가 세 번째로 14좌를 완등했다. 순식간에 한국은 8000m 봉 완등자를 세 명이나 보유한 세계 유일의 산악 국가가 된 것이다.

 

8000m가 넘는 고봉을 하나 등정하는 것은 훈련받은 산악인에게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하물며 14개의 8000m 봉을 한 사람이 모두 등정한다는 것은 정말 대단한 기록이 아닐 수 없다. 14좌 완등은 함께 고통을 나눈 가족과 동료 산악인, 현지 주민, 그리고 지원을 아끼지 않은 등산장비 업체, 끝까지 격려해준 후원자들이 있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이다. 그리고 그 뒤안길에는 꿈을 이루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동료들의 아픔도 함께하고 있다.

 

근대적 의미의 등산은 1786년 알프스 최고봉인 몽블랑을 등정하면서부터 시작됐다고 할 수 있다. 그 이전까지는 등산이 아닌 삶의 한 방편으로 산을 올랐다. 순수 등반을 목적으로 ‘세계의 지붕’ 히말라야 산맥을 찾은 것은 19세기 말경이었다. 이후 숱한 실패를 거듭한 끝에, 1950년 프랑스 등반대가 안나푸르나(8091m)를 등반함으로써 드디어 8000m급 등반 시대가 열렸고, 14년이 지난 64년에야 비로소 14개의 자이언트 봉이 모두 초등(初登)되었다.

 

그 후 히말라야 등반은 양적·질적으로 많은 발전을 거듭해, 86년 이탈리아의 등반 영웅 라인홀트 메스너에 의해 한 사람이 14개의 8000m 봉을 모두 등정하는 대기록이 달성되었다. 이후 11명의 14좌 완등자가 나왔다.

 

나라별로 살펴보면 한국이 3명으로 가장 많고, 이탈리아(라인홀트 메스너, 세르지오 마르티니)와 폴란드(예지 쿠쿠츠카, 크리스토프 비엘리스키), 스페인(후아니토 오이알자발, 알베르토 이누라테귀)이 각각 2명이고, 스위스(에라르 로레탕)와 멕시코(카르로스 카르소리오)가 1명씩 배출했다. 11명의 완등자 중 폴란드의 예지 쿠쿠츠카는 완등 2년 후인 89년에 로체 남벽을 등반하다가 고인이 되었다.

 

한 국가에서 3명 보유 세계 산악계 ‘경악’

 

흥미로운 것은 산악 강국이기도 한 영국, 미국, 독일, 프랑스, 러시아, 일본 등 선진국에서는 단 한 명의 완등자도 배출하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이를 보면 14좌 완등이라는 대기록은 돈을 쏟아붓는다고 해서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고, 국가가 많은 노력을 기울인다고 해서 가능해지는 것도 아님을 알 수 있다.

   


유럽 출신의 14좌 완등자들은 알프스나 피레네 산맥의 산악지방 출신이다. 이들에게는 4000m가 넘는 산들이 동네 뒷산이었다. 멕시코 또한 5000m가 넘는 산들이 도처에 흩어져 있다. 반면 한국은 어떤 나라인가. 최고봉은 1950m(한라산)에 불과하다. 히말라야에 진출한 역사도 이제 겨우 40년 남짓이다. 그야말로 ‘고요한 아침의 나라’인데 세상이 깜짝 놀랄 만한 대업을 이루어낸 것이다.

 

우리의 삼총사는 도대체 어떤 인물인가. 엄홍길(1960년생), 박영석(63년생), 한왕용(66년생) 씨는 세 살 터울이다. 세 사람은 산악계 일각에선 본의 아니게 라이벌로 알려져 있다. 한동안 이들은 14개 고봉을 향해 선의의 경쟁을 벌였으니 이를 부인하기는 힘들다. 그러나 이들의 경쟁은 본인 의사와 무관하게 주위 사람들이 확대해놓은 경향이 있다.

 

엄홍길 씨는 일반산악회(거봉산악회)에서 자란 산악인이다. 그리고 일반산악회를 거쳐 현재는 대학산악부(한국외대산악회)에 몸담고 있다. 박영석은 대학산악부(동국대산악회) 출신이다. 한왕용은 대학산악부(전주우석대산악회)에서 자라 일반산악회(개척산악회)에 몸담았다. 엄홍길 씨는 해군 출신이고 박영석은 공군, 한왕용은 육군 출신이다.

 

세 사람의 등반 스타일은 조금씩 다르다. ‘탱크’라는 별명을 가진 엄홍길 씨는 혼자서라도 과감히 밀어붙이는 스타일이고, 박영석은 보스 기질이 있는 등반 리더로 후배들을 잘 이끈다. 비교적 차분하고 겸손한 성격의 한왕용 씨는 두 선배의 장단점을 잘 파악해 그때그때 자신에게 맞게 활용하고 있다.

 

엄홍길 씨는 비교적 어렵게 히말라야를 찾은 악우(岳友)다. 그는 광야에서 모진 비바람을 견뎌내며 자란 잡초 같다. 히말라야에 보내준다면 어느 팀과도 잘 어울릴 줄 알았고, 수없이 실패도 했다. 86년 에베레스트 남서벽을 시작으로 무려 15년간 온 청춘을 불태우며 28번 도전해 14개봉을 등정했다. 50%의 성공률을 기록하는 동안 10명의 동지를 잃었다.

 

박영석 씨는 엄홍길 씨보다 쉽게 원정을 꾸렸으나 역시 숱한 고생을 감내해야 했다. 91년 에베레스트 남서벽에 도전한 이래 11년 만에 완등을 기록했고, 그 과정에서 7명의 동료를 잃는 슬픔을 겪어야 했다. 93년에는 에베레스트(8850m)를 무산소로 등정해 세상을 놀라게 했다. 97년엔 8000m 봉을 4개, 2000년엔 3개를 오르는 경이적인 기록을 세운 바 있다.

 

한왕용 씨는 두 선배보다 더 쉽게 히말라야 원정에 참여했다. 93년에 에베레스트 남동릉을 시작으로 11년 만에 완등자 반열에 올랐기 때문이다. 그는 엄홍길 선배와는 세 번, 박영석 선배와는 네 번 정상에 함께 올랐다. 95년 에베레스트 등정 후 내려올 때는 정상 직하에서 뒤처진 다른 팀 대원을 무려 5시간15분을 기다려 만난 뒤 기진맥진한 그를 부축해 하산하는 초인적인 휴머니즘을 발휘하기도 했다. 그래서일까. 한왕용 씨는 단 한 명의 동료도 잃지 않았다.

   



엄홍길(嚴弘吉)

 

 1986년 첫 원정 … 안나푸르나 ‘4전5기’

 

1960년 경남 고성군 영현면 봉발리에서 태어났다. 세 살 때 부모님을 따라 의정부시의 도봉산 원도봉 계곡으로 이사했다. 부모님은 등산객들을 상대로 음식장사를 했는데, 그 덕에 그는 도봉산을 놀이터 삼아 뛰놀았다.

 

본격적인 암벽 등반은 고등학교 시절 등산가들을 사귀면서 시작했다. 79년 고교를 졸업한 뒤 넓은 세상으로 가고 싶어서 설악산 희운각대피소에 들어가 ‘산사람’이 되었다. 1년 넘게 그곳에서 머물며 대피소에서 팔 물건을 지어 나르고 조난당한 사람들을 구조하면서, 설악산 곳곳의 암릉과 계곡을 누볐다.

 

81년 해군에 입대한 그는 수중폭파반인 UDT에 지원했다. 제대할 때까지 계속된 혹독한 훈련과 바다 세계의 체험을 통해 그는 강철 같은 몸을 갖게 되었다.

 

그의 첫 해외원정은 86년 겨울에 이뤄졌다. 라인홀트 메스너가 인류 최초로 8000m 14개봉에 완등할 무렵 히말라야에 첫발을 내디딘 것이다. 그러나 첫 원정으로 에베레스트 남서벽을 택한 것은 무리였다. 그는 여러 번 삶과 죽음의 갈림길을 떠돌다 등정에 실패하고 살아서 돌아왔다. 그때 그는 히말라야는 정말로 무시무시한 곳임을 절감했다고 한다.

 

88년 대한산악연맹의 에베레스트 원정대원에 선발돼 정상에 올랐다. 하지만 93년 초오유(8201m)와 시샤팡마를 연속 등정하기까지 그는 일곱 번이나 고산 등정에 실패를 거듭했다. 그런 그에게 결정적인 가능성을 실어준 사람은 바로 스페인 바스크족 산악인인 후아니토 오이아르자발이었다. 후아니토는 영락없는 스페인판 엄홍길이다. 나이는 네 살 위지만 생긴 모습도 덩치도 등반 스타일도, 그리고 낙천적인 성격까지도 판에 박은 듯하다.

 

호흡이 맞은 두 사람은 95년에 마칼루·브로드피크·로체의 3봉을 연속해서 오르고, 97년엔 가셔브룸Ⅰ(8068m)봉도 함께 올랐다. 후아니토 오이아르자발의 마지막 8000m 도전인 99년 안나푸르나 도전 때 엄홍길은 기꺼이 참가했다. 이 등반에서 성공해 후아니토는 세계에서 6번째 완등자가 되었고, 스페인에서는 최고의 산악 영웅이 되었다. 안나푸르나는 엄홍길에게 가장 많은 고통을 준 봉우리였다. 바로 이때 엄홍길도 4전5기 만에 안나푸르나 정상을 밟게 되었다. 그리고 2000년 여름 K2를 끝으로 8000m 14개봉을 모두 등정하는 대기록을 수립했다.

   


박영석(朴英碩)

 

고상돈 보며 꿈 키워 … 11년 만에 놀라운 기록

 

1963년 서울 동대문구 회기동에서 2남4녀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남달리 힘이 좋았다. 소년시절 그의 우상은 고상돈이란 산사나이였다. 중2 때 신문에서 에베레스트 정상에 우뚝 선 고상돈의 모습을 본 뒤 그 사진이 들어간 책받침만을 사용했다. 그리고 고2 때는 마나슬루원정대의 서울 시내 카 퍼레이드 모습을 보고, 동국대에 들어가 산악회원이 되겠다는 뜻을 굳혔다. 재수 끝에 꿈에 그리던 동국대 체육교육학과에 수석 합격했다.

 

그때부터 본격적인 등산 활동을 시작했다. 첫 해외원정은 2학년 말인 85년 초 일본 북알프스 종주등반이었다. 그때 그는 높은 산에는 눈이 어마어마하게 내리고 쌓인다는 것을 알았다고 한다. 군대를 마치고 복학한 88년 봄 유럽 알프스 3대 북벽에 도전했으나 좋아하던 허종행 선배을 잃고 돌아왔다. 이것이 그의 역마살 낀 해외원정의 시작이었다.

 

89년 봄에는 꿈에 그리던 네팔 히말라야로 떠난다. 랑시사리(6415m)에 도전한 그는 돈이 부족해 시계와 옷을 팔아 간신히 귀국했다. 그리고 그해 겨울, 후배 2명만 데리고 랑시사리 정상에서 보았던 랑탕리(7205m)를 향했다. 역시 돈이 부족해 비행기표만 구해서 간 것인데, 이 산의 동계(冬季) 초등을 이루었다. 두 차례의 원정을 통해 그는 히말라야 원정에는 돈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90년 여름 코무니즘 봉을 등정하고, 91년 대학 졸업과 동시에 에베레스트 남서벽을 찾았다. 캠프 3으로 오르던 중 표고 100m를 낙하하는 대형사고로 중상을 입지만, 그해 겨울 다시 에베레스트에 도전해 사우스필라로 남봉 바로 밑(8700m)까지 올랐다. 93년 봄, 남서벽의 옐로 밴드(8500m)까지 오르고, 이어 코스를 바꿔 드디어 남동릉을 통해 무산소로 등정했다. 세계 최고봉을 무산소 등정한 국내 산악인은 박영석뿐이다.

 

이로써 그의 8000m 봉 레이스가 시작됐으나 당시 그는 전혀 이를 의식하지 못했다고 한다. 94년 가을 초오유를 등정하고, 95년 다시 에베레스트 북동릉에 도전하여 8700m까지 오른 뒤 뒤늦게 14좌 완등을 의식했다. 그리하여 97년 4개봉, 2000년 3개봉을 오르고 2001년 여름 K2를 끝으로 11년 만에 14개봉을 완등하는 놀라운 기록을 세웠다.

 

그의 등반 스타일은 독특하다. 베이스캠프에 도착하면 캠프와 캠프 사이를 오르내리며 고소 순응을 한다. 그리고 날씨가 좋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알파인 스타일로 벼락 치듯 단숨에 등반한다. 1990년 고1 때부터 사귀어온 동갑내기 홍경희 씨와 결혼해 성우(14)와 성민(10) 두 아들을 두었다.

   


한왕용(韓王龍)

 

대학 때 체계적 등산 … 무모한 산행 안해

 

한왕용 씨(아래 사진 가운데가 14좌 완등 후 생태 등반으로서 히말라야를 깨끗하게 하는 ‘청소원정’에 나서고 있다.

 

1966년 9월 전북 옥구에서 3남2녀 중 3남으로 태어났다. 어릴 때 동네 뒷산은 그의 놀이터였다. 중학교 시절엔 축구부, 고교 시절에는 야구부 활동을 했고 대학 시절 산악부에 가입해 체계적으로 등산을 배웠다. 첫 해외원정은 제대 후 복학생이던 92년 초 전북학생산악연맹에서 시행한 일본 북알프스 동계등반이었다. 그해 여름 칸텡그리(7010m) 원정에 참여할 기회를 얻었으나 6500m쯤에서 고소병으로 쓰러져 정신을 잃었다. 구조대가 급히 올라와 베이스캠프로 그를 옮겼고, 며칠 후 자리에서 일어난 그는 다시 도전에 나서 결국 정상을 밟았다.

 

93년에는 전북산악연맹의 에베레스트 원정대원으로 선발되었다. 그러나 등반 중 수분 섭취를 소홀히 한 탓인지 폐수종 증상이 나타나 7300m에서 내려왔다. 귀국 후 개척산악회에 가입한 그는 94년 이 산악회의 초오유 및 시샤팡마 원정대에 참여했다.

 

95년 에베레스트 북동릉을 등반했을 땐 같은 코스로 올라와 30분 늦게 정상에 선 고대산악회 대원 1명과 셀파 1명이 하산 중 내려오지 않자 세컨드 스텝 부근에서 무려 5시간15분을 기다려, 기진맥진해서 내려오는 대원을 부축해 8300m 지점에 있는 제5 캠프에 밤 11시가 넘어 도착했다(셀파는 추락사했다).

 

96년에는 우석대산악회와 포베다(7439m), 박영석 팀과 아마다블람(6812m) 정상에 올랐다. 97년이 되자 다시 자이언트 봉을 찾았다. 이해에 그는 동국대팀과 다울라기리, 한국대학산악연맹과 가셔브룸Ⅰ봉, 개척산악회팀의 로체봉 도전에 참여해 성공했으나 겨울의 마나슬루 도전에는 실패했다. 자이언트급에선 비교적 쉬운 편이라는 마나슬루의 노멀 루트가 그에겐 유독 어려웠다. 날씨 운이 없었기 때문인데 3전4기 만에 성공했다.

 

98년 엄홍길 팀에 참여하여 안나푸르나에 오르면서 막연하게나마 8000m 봉 완등을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귀국 후 바로 짐을 꾸려 나관주와 함께 낭가파르밧(8125m) 도전에 나서 성공했다. 단 둘이 오른 이 등반을 그는 생애에서 가장 멋진 등반이라고 기억한다.

 

그는 언제나 겸손하고 낙천적이다. 전형적인 극지법을 선호해 무모한 산행은 피한다. 안전에 유의하며 서두르지 않는다. 그래서인지 그 자신은 눈사태를 두 번 당하고, 여섯 번이나 크레바스에 빠졌지만 단 한 번도 동료를 잃은 적이 없다. 현재 에델바이스 홍보팀장으로 근무하고 있으며, 아내와 대성(6)·대산(5) 두 아들이 있다.   (끝)

2000년 K2 등정 때는 산소통이 고장 난 선배에게 자신의 산소통을 양보하고 무산소로 올랐다. 그러나 그 후유증으로 귀국 후 네 차례나 뇌혈관수술을 받았다.

 

그는 언제나 겸손하고 낙천적이다. 전형적인 극지법을 선호해 무모한 산행은 피한다. 안전에 유의하며 서두르지 않는다. 그래서인지 그 자신은 눈사태를 두 번 당하고, 여섯 번이나 크레바스에 빠졌지만 단 한 번도 동료를 잃은 적이 없다. 현재 에델바이스 홍보팀장으로 근무하고 있으며, 아내와 대성(6)·대산(5) 두 아들이 있다.   (끝)

 

 

 

출처 : 청이산악회
글쓴이 : 산지기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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