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탤런트 전원주 씨가 삶에 관해 언급한 감동적인 글입니다
외모의 핸디캡을 뚫고 성공한 연예인으로서 원숙한 연기, 모범적인 사회활동을 전개 중인 66세의 그녀에게 찬사를 보냅니다.
나의 삶 / 전원주 (탈렌트)
너무 많은 것들이 힘들게 보이는 요즘같은 상황에서 여러분들을 보면 대단하게 느껴진다.
연예인 세계도 엄청나게 경쟁이 치열하다.
방송국에 연예인만 1,600여명이 있고, 그 중의 대다수가 무명이다.
다 아시겠지만 무명 시절은 기약도 없고 항상 배가 고프다.
그들이 제일 많이 하는 일은 연출자들에게 얼굴도장 찍는 일이다.
그래서 일이 있으나 없으나 매일같이 연출자들에게 얼굴이라도 한 번 더 보이려고 왔다갔다 한다.
무슨 일이든지 "많이 뛰고 만나서 얼굴도장 찍는 것"이 기본이다
내가 키가 이렇게 작은 게 어릴 때 못 먹고 일을 많이 해서 그렇다.
5학년 때부터였는데 그 때 제일 많이 한 일이 물지게를 지고 식수를 길어 나르는 일이었다.
인천에 살 때였는데 그 곳은 짠물이 많이 나서 식수가 절대적으로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그 때 그 무거운 물지게가 나를 짓눌러서 이렇게 키가 안 자란 것 같다.
밥도 짓고 등등 무지무지하게 힘든 나날이었는데, 그 때 어머니가 우리를 강하게 교육시키지 않았다면 오늘의
나는 없었을 것이다.
역시 교육이 중요한 것이다.
내가 "계모"라고 믿었을 만큼 어머니에게 많이 혼나고 얻어맞고 자랐는데, 그 땐 울면 더 맞았고 만약 변명이라도 할라치면 그 날은 완전히 죽는 날이었다.
여러분도 자녀를 키울 때 강하게 키워야 한다.
성인이 되어서 나약하고 자신의 실수 등에 대해 변명하는 사람은 절대 출세 못한다.
산에 가서 잡초를 뽑을 때도 뿌리 채 쉽게 뽑히지 않는다.
그만큼 혹독한 환경에서 악착같이 컸기 때문이다.
반대로 온실에서 자란 화초를 생각해보라.
살짝만 힘을 줘도 금방 뽑히지 않는가?
우리도 잡초처럼 살아야 하고 자녀도 그렇게 키워야 한다.
우리 어머니는 억척스럽게 일했다.
떡도 팔고 무엇이든 닥치는 대로 만들어 내다 팔았다.
그러던 끝에 돈을 모아서 서울로 이사를 하게 되었고, 이사하는 전날 밤에 짐 보따리를 전부 싼 상태에서
"원주야~" 하고 나를 부르시는 것이었다.
허구한 날 쥐어박고 꼬집고 꾸짖고 하시던 분이 처음으로 나를 다정하게 부르시는 것이었다.
안방으로 건너가니 어머니께서는 내 손을 따뜻하게 꼭 잡고 "큰 딸, 그동안 고생 많이 했다.
서울 가면 너 하고 싶은 것 전부 해 줄게" 하시는 것이었다.
그 때서야 나는 어머니의 사랑과 위대함을 알게 되었다.
어머니는 동대문 시장에 포목상을 내고 장사를 하셨는데, 그야말로 돈을 긁어 모을 만큼 수완이 좋았다.
손님이 오면 뭐라도 먹였다.
떡이든 주스든... 언젠가 내가 물어보았다.
엄마는 어째 그렇게 장사를 잘 하우? 어머니 말씀은 다음과 같았다.
"딴 거 없다. 손님 가슴에 거울을 대고 비춰 보면 된다"는 말씀이었다.
손님이 뭘 원하는지, 어느 정도가 어떤 일에 필요한지, 즉 손님의 가려운 곳을 알고 조금만 긁어 주면 된다는
것이었다.
특히 뭔가를 정성으로 대접하는 것은 제일 중요하다는 것이었다.
손님이 주스를 마시는 사이 어머니는 옷감을 몇 마! "부~욱" 자르면서 이게 제일 좋습니다~"하고 말하면
그 손님은 "어 어~" 하면서도 웃고 그냥 그 물건을 사가는 것이었다.
그 정도로 장사 수완이 있었으며 나는 그것을 "찬스"에 강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여러분도 찬스에 강해야 한다.
그리고 항상 무엇이든 간에 대접을 하면 반드시 효과적이라고 생각한다.
부부도 성격이 맞아야 뭐라도 잘 되는 것 같다.
우리 어머니가 그렇게 목소리도 남자 같고 성격도 화끈 털털했던 반면 아버지는 정반대였다.
조용하고 소심하고 목소리도 여자 같았다.
어머니 같으면 손님이 최종 결정을 말하기 전에 이미 분위기를 주도해서 옷감을 부욱 자르고 있었을 텐데
아버지는 손님이 최종 결정을 하기 전까지는 꼼짝 않고 가위만 들고 서있는 그런 유형이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장사가 끝난 후에 물건을 다시 정리해서 가지런히 재진열하고 회계 정리를 하고 하는 일에는
특출하셨다.
두 분이 고스톱을 칠 때면 어머니는 이미 이것 저것 따와서 점수가 나 버렸는데, 아버지는 그 순간에도 자기가
따와서 무릎 앞에 깔아 놓았던 오끗 짜리나 열끗 짜리 몇 장이 비뚤어지지 않도록 각을 가지런히 잡고 있는
그런 스타일이었다.
일의 순서도 큰 일을 먼저 해야 빨리 성공하는 것 같다.
내가 성장해서 연예인 생활을 하면서 가정부 역만 20년을 했다.
주인 마님만 강부자, 여운계, 사미자 등으로 수도 없이 바뀌어도 나는 영원한 가정부였다.
많은 사람들이 내가 대학 출신(숙명여대)이라고 하면 목젖이 보이게 놀라고, 이렇게 작은 전원주도 운전하고
다닌다고 하면 더 놀란다.
한 번은 운전을 하고 가는데 경찰이 보고 사람 없는 차가 혼자 굴러가는 줄 알고 뒤쫓아온 적도 있었다.
그런 일이 내겐 엄청난 스트레스였고, 나는 "연예계 생활의 첫 단추를 한 번 잘못 꿰어서 계속 그런 이미지만
갖고 산다"고 느꼈다.
사실 나는 처음에는 교편을 잡았었다.
한 번은 학교에서 학생들이 잘못한 일이 있었는데, 훈육선생이 그걸 보고 "너희들 똑바로 서 어금니 꽉 깨물어" 하는 것이었다.
그 때만 해도 여학생들도 뺨 정도는 다 때렸으니까.
그러면서 학생들을 한 명씩 뺨을 때리는데, 옆에 섰던 나도 학생인 줄 알고(키가 작으니) 뺨을 가차없이
때리는 것이었다.
나는 그 자리에 쓰러진 채로 결심을 했다.
"이건 내 일이 아니다" 그리고 학교를 퇴직했다.
뭘 할까 하다가 바로 그 당시 동아방송에서 공모했던 성우 모집에 응했다.
하느님은 정말로 공평하셔서 나는 목소리 하나는 타고 났었다.
프로그램을 맡아서 방송을 하는데 목소리가 너무 고와서 꽤 인기였다.
내 목소리만 듣다가 얼굴 한 번 보겠다고 방송국에 와서 내 얼굴 보고 졸도한 남자 여럿 있었다.
어쨌거나 말은 인격이라고 했다.
말 한 마디로 천 냥 빚을 갚기도 하고...
말은 한결같이 잘해야 한다.
운전하는 사람이 평소에는 곱게 말하다가 다른 운전자가 끼어 들기라도 하면 바로 험한 얘기가 튀어나온다.
그걸 애들이 배우는 것이다.
말을 잘 하는 것은 본인에게도 좋지만 자녀에게는 산 교육이 되는 것이다.
내가 TV 방송에 출연할 때 얘기를 하겠다.
아까도 얘기했지만 연예인 세상은 엄청나게 치열하다.
흐지부지 목적없이 살면 절대로 좋은 길로 못 가고 운전하다 1분 안에 세 번 차선을 바꾸는 사람과는 상종하지
말라는 말도 있듯이 탤런트는 굳건한 의지를 가져야 산다.
대사를 다 외우는 것은 기본 중의 기본이고, 잊어 먹지 않도록 암기 연습도 죽도록 하고, 연습 시간을
확보하려면 시간 관리에 철저해야 한다.
그래도 떨면 대사를 까먹기 마련이라 배포까지 키워야 한다.
그래야 캐스팅이 잘 된다. 여러분들의 계약 활동하고 똑같지 않느냐.
우리는 녹화에 3번 지각하면 쫓겨나고, 같은 장면 NG 세번 내면 다음부터는 안 써준다.
통상적으로 남자가 더 떨었던 것 같다.
밥을 씹으면서 연기하면 대사를 까먹을까 봐 씹지도 않고 얘기하다
밥알이 다 튀기도 하고...
내가 무당 역을 맡을 일이 있었는데
그 때의 대사 중에 가장 힘든 것이 귀신 이름을 7가지 외우는 것이었다.
일주일 내내 연습했는데 연기 도중에 예상치 않았던 꽹과리 소리가 요란히 울리는 바람에 그만 까먹고 말았다.
그 때부터 연출자들 사이에 "전원주는 새대가리"라는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소문은 진짜 무서운 것이다. 한나절에 무려 30명에게 전파를 하더라.
김을동 씨는 잠이 많아서 지각을 하는 바람에 배역을 못 받은 적도 있었고, 김성환씨는 극중 대감 이름 7명을
줄줄이 읊어야 했는데, 그걸 컨닝을 하려는 요령을 피우려다 누군가가 컨닝용으로 대감들 이름을 적어놓은
부분을 지우는 바람에 막상 그 대목에서 너무 당황하여 "최불암 대감, 박근형 대감..." 등으로 실제 인물의
이름을 말하는 바람에 6개월간 배역을 못 받은 적도 있었다.
그 때부터 전원주 = 가정부, 김성환 = 도둑(운 좋으면 포졸)으로 이미지가 굳어버렸다.
7이라는 숫자 때문에 고생한 우리들이었다.
밑바닥 생활이 얼마나 힘든 것인가. 마님 역할은 비스듬히 누워서 "밥상 들이거라" 하는 말 한 가지면 끝나지만 가정부 역은 밥상 들고 방문을 10번 이상 들락 날락 거리고, 상이 바닥에 소리 안 나게 놓아야 하는 등,
노동도 그런 노동이 없다.
게다가 애까지 업은 채로 밥상을 나르는 역이 있는 날이면 정말 중노동이었다.
그러고도 집에 오면 그 장면 하나라도 보려고 TV를 켜면 안 나올 때가 부지기수였다. 편집된 것이다.
우리들은 방송에서 편집되면 그나마 한 푼 출연료조차 없는 시절이었다.
그 때문에 결혼해서 애를 다 키우면서까지도 나는 우리 어머니께 얻어맞고는 했다.
동네 아주머니들이 "TV 에 안 나오거나 나와도 가정부에다 그나마 1, 2초면 사라진다..."등등 어머니 부아를
돋구었기 때문이었다.
어머니는 그랬다. "이 년아 다 괜찮은데 어째 너 하나가 이리 속을 썩이냐. 너만 잘 풀리면 원이 없겠다..."
그러나 나는 돈 한푼 없었어도 매일같이 방송국에 출근했다.
얼굴 도장을 찍기 위해서였다.
김성환씨하고 함께 방송국에 들르는 날이면 많은 사람들이 쳐다보며 자기들끼리 수군거렸다.
"저기 봐. 식모하고 도둑놈하고 또 왔네"하고...
아들놈이 국민학교를 졸업하는 날이었다.
아들놈이 보고 싶고 축하해주고 싶어서 학교에 갔는데, 아무리 둘러봐도 보이지 않기에 집에 왔더니 벌써
돌아와 있는 것이었다.
그 때 아들 녀석이 한 말,
"엄마는 뭐 하러 학교에 와 가지고 망신을 시키고 그래..."
나는 묻지 않았지만 알 수 있었다.
애들이 나를 보고 "식모 왔다!"라고 놀렸을 게 분명했다.
그 때 나는 정말로 탤런트 생활을 때려치울까 밤을 새서 고민했었다.
성공한 지금에 와서는 곰곰이 생각해보면 성공에는 다음과 같은 4가지 원칙이 있다고 생각한다.
첫째 마라톤의 원칙이다.
과욕 부리지 않고 목표를 정하고 속도 조절하면서 꾸준히 뛰는 것.
둘째 날씨의 원칙이다.
비바람, 폭우가 몰아치는 날이 있어도 어느 날 분명히 해는 뜬다.
희망과 긍정적인 자세를 잃지 말고 실패해도 좌절하지 말고 오기를 갖고 인내하라.
셋째 합창의 원리이다.
사람들과 호흡을 잘 맞추는 사람이 인기가 있다.
노래방에서 제일 싫은 사람이 누구인가? 마이크 독점하는 사람,
남이 노래 부르는데 꼭 끼어 들어서 노래 망치는 사람,
악만 바락바락 쓰는 사람. 흥겨운 분위기에 처진 노래 부르는 사람.
넷째 등산의 원리이다.
처음에 산에 오르기로 해도 출발하기가 망설여진다.
그 때 과감하게 일어나서 출발하는 것이다.
한참을 오르다 보면 힘도 들고 땀도 난다.
그 때 이 정도만하고 그만할까 하는 생각이 들게 마련이다.
그 사람은 정상의 맛을 영원히 못 본다.
끝까지 올라가면 모든 것이 발 아래 있는 법이다.
정상의 맛은 아무나 느끼지 못한다.
참고 꾸준히 목표만 바라보고 인내를 거듭할 때 기회가 오는 것이다.
사람은 밝고 긍정적이어야 하는데, 나는 그렇게 연예계 생활에서 그 오랜 세월을 빛 한 번 못보고 구박만 받고
지내다 보니 항상 우울하고 사람들과 말도 않고 혼자서 중얼중얼 대는 습관이 생겼다.
그래서 별명이 '쭝얼이'였다.
먹고 살기도 힘들어서 시장을 봐도 미아리시장 밤 8시 정도 시장이 파장할 때 가곤 했다.
그 때 가면 팔다 남은 야채 등을 헐값에 살 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던 어느 날 밤이었다.
시장 어디에선가 장사하고 번 돈을 세는 아주머니 한 명이 시장이 떠나갈 듯 유쾌한 웃음을 웃어 대는 것이었다.
그 웃음을 듣는 순간 나는 그 순간 10년 묵은 체증이 쑥 내려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래 웃고 살자' 이렇게 굳게 결심했다.
그 다음부터 나는 매일 시도 때도 없이 집에서 거울을 앞에 놓고 웃는 연습을 했다.
아들이 "엄마 왜 그래, 웃지마 귀신 나올 거 같아." 할 정도로 미친 듯이 웃어 제꼈던 것 같다.
그랬더니 10일만에 웃음 소리가 시원하게 터져 나오는 것이었다.
방송국에 들른 나는 갑자기 한 생각이 떠올랐다.
"그래, 연출자들한테 약이나 올려 주자".
연출자 대기실에 연출자들이 20명 정도 모일 때를 기다려 문을 살그머니 열고 들어가서 갑작스럽게 "와하하하~~~" 하고 사무실이 떠나가라 웃어 주고는 뒤도 안 돌아보고 나왔다...
나오는 내 눈에 눈물이 고였다.
'내, 이 나이에 이런 짓까지 해야 하다니'하는 생각 때문에.
그랬는데 어느 날 새 드라마를 방송하게 되었는데 조연 중에 한 명으로 내가 발탁되었다.
시골의 순박한 아주머니 역할이었는데, 시골 아줌마들은 통상적으로 목소리도 크고, 웃음도 잘 웃어야 하는데,
연출자들이 혼비백산하도록 웃어 제꼈던 그 날의 내 행동이 인상깊게 남아있다가 '드라마 성격에 전원주
웃음소리가 딱이다'라는 의견이 터져 나왔던 것이었다.
그 드라마가 바로 그 유명한 '대추나무 사랑 걸렸네' 였고 장장 7년 6개월을 장수한 대히트 드라마였다.
거기에서 드디어 나는 떴던 것이었다.
그만큼 방송국에서의 경쟁은 엄청나게 치열한 것이었고 나도 죽을 힘으로 경쟁했던 것이다.
우리 어머니는 아까도 말했듯이 모든 것을 다 책임져 내신 분이셨는데 막상 본인의 건강을 책임지지 못하셨다.
수금하러 갔다가 언쟁 중에 쓰러지셔서 중풍을 맞고 13년 8개월을 병석에 누워 계시다가 당뇨, 실명까지 와서
별세하셨다.
어머니 상을 치를 때 극중 내 남편역인 김인문 씨가 와서 마치 사위처럼 모든 일을 다 치뤄 주었다.
사람들이 우리 집안의 사위가 바뀐 줄 착각할 정도였다.
그런 헌신적인 도움을 받고 나는 "이것이 사람이 더불어 살아야 하는 이유이자 도리"라는 것을 깊이 느꼈다.
여러분도 건강해야 하고 그러려면 스트레스를 해소할 줄 알아야 한다.
그러기에는 시원한 웃음과 노래가 제격이다.
아울러 사람들과 더불어 살고 돕는 것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렇게 나는 오랜 고생 끝에 인기인이 되었다.
CF 도 줄줄이 찍었고...
20년을 참고 뜬 태양은 지지도 않더라.
여러분도 인내하고 밀어붙이고 노력하면 성공한다.
지금 난 일년치 스케줄이 새카맣다.
오늘만 해도 네 군데 일정이 있다. 강연 2번, 녹화 2번.
일이 많으면 피곤하지도 않고 일이 없을 때 힘들고 피곤한 법이다.
노력하는 사람은 작아도 커 보인다.
얼굴이 이뻐도 행동이 미우면 박색이고 얼굴이 미워도 하는 짓이 이쁘면 양귀비로 보인다.
살면서 근면하고, 절약하고, 원칙을 세우고, 남편과 자식들한테 잘해주고... 해야 할 것이 많다
난 꿈이 또 있다. 음반을 내고 가수가 되는 것이다.
지금 댄스 가수들이 나를 보고 '후배'님이라고 웃으며 얘기한다.
내 나이 66세이지만 80세까지는 끄떡없이 뛸 자신이 있다.
여러분도 오로지 내일을 향해 뛰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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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래
*흰눈속의 흔적여행 *
흐른는 세월속에
조각된 무늬가
얼굴에 고스란이 새겨지고
불타며 뜨겁던 가슴이
숨 고르기 도 하기 전에
탈색된 홀씨 처럼
바람 타고 날으며
어느새 흰 눈이 되어
아리던 흔적 하햫게 덮어 버린다
설원의 백야 속에
곱디고운 날개 달고
빤짝 이는 빛 사이로
인연 찾아 날아 다니며
그리움의 미로 속에서
찾을 듯 만날듯 하면서도
애타는 눈망울로 스치고 지나가니
흘러간 추억 속에서
흔적 찾는 가슴 알이
언제쯤 상처가 아무어 지려나~~~~~*
푹설이 내리면 떠나는 흔적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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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맞으며 오른 용문산은 생각처럼 쉽지만은 않았다...
능선을 타고 올라갈 때는 그나마 눈이 쌓이지 않았고...
바위도 그다지 미끄럽지 않았었는데...정상 부근에서
정상주로 막걸리 한잔하고 간단하게 요기를 한 뒤부터
상황은 급변하여 방위를 구분할 수 없는 구름...안개와
운해로 정상부근에서 조금 헤매다 겨우 계곡쪽으로
방향을 잡고 하산 하였다...눈 밭을 헤매느라 등산화
안쪽은 눈이 들어와서 녹아서인지 물기가 질척했고
땀으로 눈으로 장갑도 얼고 바위에서 이끼에 미끌...
그나마 낙법으로 몸을 돌려 손바닥과 팔꿈치 하박으로
떨어져서 부상은 모면...마침내 폭포까지 내려가니
인공 다리가 보이고...맘을 놓으니 주위는 어둑어둑
계곡입구에서 찬물에 발을 씻어 피로를 풀고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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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때 ‘금방 내려올 산을 왜 힘들게 올라가느냐‘고 투덜대기까지 했지만
충북 괴산에 있는 낙영산은 등산 초짜의 눈에도 참 매력적입니다.
가끔 산을 다니지만 같은 산을 2주만에 다시 간 경우는 낙영산이 처음입니다.
제가 사는 청주에서 차로 한 시간 남짓이면 도착할 수 있어 우선 오가기 편리합니다.
<고향 형님인 법무법인 주성 최윤철 변호사 왈 “낙영산은 게으른 등산객이 휴일 늦잠자고 일어나
점심 먹고 갑자기 산에 가고 싶어졌을 때 가는 산”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사진= 낙영산 등반중인 아빠와 이성주>
산 높이도 해발 684미터로 그다지 힘들지 않고, 가장 좋았던 건 산 전체가
기암 괴석으로 덮여 있는데 대부분의 바위 암벽이 특별한 도구 없이
기어오를 수 있을정도로 완만하고 위험하지 않다는 점입니다.
함께 간 여덟살 아들 성주가 암벽을 기어오르며 너무 신나했던 기억이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사진= 낙영산 완만한 암벽을 오르고 있는 아빠와 이성주, 저 뒤에는 회사 신병관 선배>
또 산의 방향이 남동쪽을 향하고 있어 하루 온종일 따뜻한 햇볕을 받으며
산에 오를 수 있고, 그 덕에 산에 오르는 동안 정기를 팍팍 받는다는 느낌이 들어
기운이 샘솟습니다.
<사진 = 낙영산 등반 도중 따듯한 햇살을 받으며 잠시 휴식하는 아빠와 이성주>
<낙영산 정상에 오른 아빠와 이성주, 맨 왼쪽은 대전일보 엄재천 선배>
산 입구에 자리잡고 있는 속리산 법주사의 말사인 천년 고찰
공림사도 낙영산을 매력적으로 만드는데 한몫합니다.
공림사는 신라 경문왕때 자정선사가 창건했군요.
산에 오를 때는 공림사를 바라보고 오른쪽으로 올라가서
산 능선을 타고 왼쪽으로 내려오는 코스가 개인적으로 더 좋아보입니다.
왼쪽으로 올라가면 처음부터 한동안 고바위가 버티고 있어 초행자는 힘들어 합니다.
또 어린아이들과 같이 갔을 때 암벽타기 놀이를 할 수 있는 것도 왼쪽 코스입니다.
<사진= 낙영산 정상에 오른 이성주, 왼쪽은 대전일보 엄재천 선배, 오른쪽은 청주 mbc 신병관 선배>
등산코스는 빨리 올라갔다 오려면 한시간 반이면 충분합니다.
좀 쉬고 암벽도 타고 하면 더 걸리겠지요.
코스가 짧아 아쉽다는 분들은 바로 옆에 붙어 있는 도명산으로 바로
옮겨 탈 수도 있다고 합니다.
산 정상에 서면 앞이 탁 트여서 경관이 좋고
백두대간 주,능선의 장쾌한 모습과 속리산 봉우리들도 한눈에 들어와
안구 호강 보장합니다.
다만 겨울에 가시는 분들은 하산길에 산 뒤쪽에 눈이 잘 녹지 않고
빙판이 있어 미끌어져 다칠 위험이 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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