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라피*의 밤
가라피의 어둠은 짐승 같아서
외딴 곳에서 마주치면 서로 놀라기도 하고
서늘하고 퀴퀴한 냄새까지 난다
나는 그 옆구리에 누워 털을 뽑아보기도 하고
목덜미에 올라타보기도 하는데
이 산속에서는 그가 제왕이고
상당한 세월과 재산을 불야성에 바치고
어느날 앞이 캄캄해서야 나는
겨우 그의 버러지 같은 신하가 되었다
날마다 저녁 밥숟갈을 빼기 무섭게
산을 내려오는 시커면 밤에게
구렁이처럼 친친 감겨 숨이 막히거나
커다란 젖통에 눌린 남자처럼 허우적거리면서도
나는 전깃불에 겁먹은 어둠들이 모여 사는
산 너머 후레자식 같은 세상을 생각하고는 했다
또 어떤 날은 산이 노루새끼처럼 낑낑거리는 바람에 나가보면
늙은 어둠이 수천 길 제 몸속의 벼랑에서 몸을 던지거나
햇어둠이 옻처럼 검은 피칠을 하고 태어나는 걸 보기도 했는데
나는 그것들과 냇가에서 서로 몸을 씻어주기도 했다
나는 너무 밝은 세상에서 눈을 버렸고
생각과 마음을 감출 수 없었지만
이곳에서는 어둠을 옷처럼 입고 다녔으므로
나도 나를 잘 알아볼 수가 없었다
밤마다 어둠이 더운 고기를 삼키듯 나를 삼키면
그 큰 짐승 안에서 캄캄한 무지를 꿈꾸거나
내 속에 차오르는 어둠으로
나는 때로 반딧불이처럼 깜박거리며
가라피를 날아다니고는 했다
*양양 오색에 있는 산골 마을.
詩/이상국
지나온 것들이 내 안에 가득하다
- 호삼에게
산에 오르면 산으로 가득 차야 하건만
마음의 길은 자꾸 떠나온 쪽으로 뻗는다
세상 밖으로 가지 못한 바람 불고
추억은 소매치기처럼 떠오른다
사람의 말들이 이슬로 내리던 밤이 있었다 그 밤에
그 남자와 그 여자와 밤을 새웠다 나는
외로워지고 싶어 자꾸 지껄였다
그 여자는 가늘었다 가는 여자 가버린 여자
그 남자는 흘러갔다 흘러간 남자 홀로 간 남자
그 여자를 나의 길(道)로 믿었던 적이 있었다
그 남자를 나의 길(道)로 믿었던 적이 있었다
가는 것들이 나를 갉아 나는 자꾸 작아진다
구슬처럼 작아져 나는 왔던 길로
거슬러 가지 못한다 헉헉대며 굴러온 세월
오래 된 인간의 말들이 돌 되어
길을 막곤 했다
세상이 나보다 더럽게 보여
깨끗한 극약을 가지고 다닌 적이 있었다
저지르고 싶어 팔 무너지고 싶어
이 집은 그 집이 아니야 그 집은 어디 갔지?
나는 왜 자꾸 철거당하는 걸까?
산 깊어 길 없고 지나온 길들이 내 안에서
실타래처럼 풀린다 이 언덕은 미끄러워 자꾸
나를 넘어뜨린다 감자처럼 궁구는 내 몸뚱이
세월은 비탈지구나 그러나
세상을 믿어 나는 괴로웠다
하루가 지나면 하루만큼의 상처가 남고
한 사람이 지나가면 한 사람만큼의 상처가 남는다
상처받을 수 있다는 건 씹다 뱉는 희망보다
얼마나 큰 선물인가 노래를 부르며
나는 걷는다
생의 뒷장을 넘기지 못하고 세월이여
불행으로 삶을 엮는 사람의 죽음은 불행인가 무엇이
지나온 길을 내 안에 묶어 두는가
詩/이대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