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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 사진 # 22 - 2010년 9월 16일~12월 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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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프리
글쓴이 : 실비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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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으로 본 지구촌 4월의 풍경 (2010.4)

 

 

 

 

 

출처 : 프리
글쓴이 : 실비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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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 사진 # 18 - 2010년 4월 1일~4월27일

 

 

 

 

출처 : 프리
글쓴이 : 실비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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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4월7일

한국을 떠난지 만 삼년째 되는 날이다.

그립다,그곳의 모든 것들이 너무도 그립다.

그리고 내 어머니,아버지가 너무도 보고 싶다.

하지만 들어 가고 싶어도 갈 수 없는 내 조국.

그래서 오늘도 이렇게 목이 메이게 운다.

 

2006년 4월8일

 미국의 남북전쟁을 전후하여 하와이의 사탕수수 산업은 그 중요성을 더해가고, 이에 하와이의 사탕수수와 파인애플 농장주들은 이 산업을 확대하기 위해 외국으로 눈을 돌렸다.
이들은 처음에 유럽에서 노동력을 수입하려 했으나

별로 여의치 않자 아시아에서 노동자를 수입하기 시작했다.
그에 따라 제일 먼저 중국인 노동자들이 들어왔고

1880년대부터는 일본인 노동자들이 하와이로 이주했다.

 

당시 대기근으로 가난과 굶주림에 시달리던 조선 노동자들에게

1902년 11월 고종이 노동 이민을 허락함으로써

우리나라 최초의 이민역사가 이루어지기도 한 이곳.

 

하지만 어디 이곳이 예나 지금이나 그리 호락호락한 섬이였던가.

 

그들에게 기다리고 있는 것은 연분홍빛 희망보다는 척박하고 힘든 고생의 나날들이었다.

 

1905년 하와이 마우이 섬으로 이민을 온 최용운 할머니가 읊었던 시에는 그들의 답답함과 슬픔이 절절하게 드러나고 있다.



강남에 노든 속에
봄바람 소식 실은 배 만리나 떨어져 있으니
친척들과 이별하고 조상님의 묘 버린
슬픔을 뉘 알리요.
새 울어 눈물 보지 못하고
꽃 웃어도 소리 듣지 못하니
좋은 것 뉘가 알고
슬픔인들 뉘가 알리.
 
 

2006년 4월9일

AM 4시.

내일 첫 촬영을 위해 새벽 교대를 마치고 그 피곤한 눈을 껌뻑이며 수정 대본을 받으러 와준 Mike.

난 무엇으로 갚아야 할까?

최선을 다할께,Mike.

 

내일의 스케쥴을 정리해 보자.

오후에 저스틴에게 다시 한번 장소 확인 및 하와이안 친구들 섭외 확인.

저녁 여섯시 펠레에서 Mike을 만나 대본 연습. 

일곱시 반까지 모든 준비 완료.

여덟시 대망의 첫 촬영.

 

2006년 4월10일

일어나자마자 뛰었다.

비가 와도 바람이 날카로워도 개의치 않았다.

그러다 잠깐 비추어진 태양을 만날수 있었다.

그나마 내가 아는 가장 오래 사는 놈이라 아직까진 저놈을 뭍히는게 가장 고맙고 감사하다.

촬영 1시간전.

너무너무 고요했다.

담담히 스케쥴 체크를 위해 Mike에게 전화를 했다.

마침 전화하려던 참이였단다.

조금전 갑자기 세살 된 딸아이가 열이 치솟아 지금 병원이란다.

그리고 정말 미안하단다.

어쩔 수 없었다.

 

갑자기 근방에 산다는 민기가 떠올랐다.

 오늘 다행히 일이 없어 집에서 쉬고 있다는 그를 극적으로 섭외했다.

뭐..느낌은 더 적절하다.

 

그제서야 겨우 한숨을 돌리며 베란다로 나갔다.

무지개가 떠 있었다.

이때까지 한번도 보지 못한 가장 크고 웅장하고 빈틈없이 꽉 차있는 선명한 놈이였다.

맹세한다.

 

기도를 했다.

두손을 모으고 고개도 숙였다.

 

기도를 끝내고 돌아서는 길에 곧바로 어머니께 전화가 왔다.

마음이 들뜬다.

희안하다.

운명의 섬 하와이.

마음이 들떴다.

 

유신이와 진평이를 짐칸에 태우고 저스틴의 트럭을 타고 펠레로 향했다.

든든하다.

 

약속대로 민기와 사카모토씨가 미리 와있었다.

너무 기뻤다.

이윽고 저스틴의 친구들이 속속 도착했다.

Silva,Hashim,Junior.

기분 최고다!

 

촬영 10분전  L.A에 있는 Gio에게서 전화가 왔다.

참 희안하다.

반가운 사람들이 오랫만에 오늘 모두 전화를 해준다.

 

촬영은 즐거웠다.

아주아주 행복했다.

 

기획단계부터 거의 두달여만에 이루어진 첫촬영.

진이 다 빠진다.

사람들이 돌아가고 난 털썩 주저 앉아 버렸다.

 

술을 마셨다.

술이 어느 정도 취하니 갑자기 도현이가 그립다.

 너무 보고싶다.

용기를 내어 그녀에게 전화를 했다.

아주 편안하고 즐거운 통화.

날라갈 듯 기뻤고 다시 한번 깃털처럼 잠시 공중에 둥실둥실 떠 있었던 것도 같다.

 

술을 더 마셨다.

전화가 왔다.

너무도 오랫만의 태현이 형이다.

갑자기 그녀의 안부를 묻는다.

참 뜬금없고 어색하고 희안하다.

 

전화를 끊고 나니 뭔가 휑하니 스치고 지나 간다.

갑자기 알겠다.

전구가 켜졌다.

 

둘다 쳐 죽이고 싶다.

곧 심장이 터져 버릴 것같이 요동쳤다.

하지만 이미 사악한 나는 술을 더 마셔 버리고 쓰러져 버렸다.

 

그래,오늘도 참 멋진 SCENE이다.

 

2006년 4월24

얼마전 바 촬영때 도와 준 저스틴의 친구 Silva의생일이다.

공교롭게 내 생일과 똑같다.

-오늘을 기억해 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는데 마침 참 잘되었다.-

몇번의 부탁끝에  드디어 그의 생일 파티에 초대받았다.

촬영허가같은 초대라서 더욱 기쁘다.

HAWAIIAN GARAGE PARTY 

한 삼십명은 족히 모인 것 같았다.

유신은 쉴새 없이 카메라를 돌렸고 나는 쉴 새없이 웃어 댔다.

집으로 돌아 와 진평이의 스틸 사진을 점검했다.

훌륭했다.

 

아주 멋진 놈이 탄생할 것 같다.

 

나는 오늘 서른 한살이 되었다.

 

 

 

 

 

 

 

 

 

 

to be continue... 

 

 

 

 

 

 

 

 

 

 

출처 : CLUB OSHALE LION
글쓴이 : OSHALE LION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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탤런트 전원주 씨가 삶에 관해 언급한 감동적인 글입니다

외모의 핸디캡을 뚫고 성공한 연예인으로서 원숙한 연기, 모범적인 사회활동을 전개 중인 66세의 그녀에게 찬사를 보냅니다.

 

 



나의 삶 / 전원주 (탈렌트)

너무 많은 것들이 힘들게 보이는 요즘같은 상황에서 여러분들을 보면 대단하게 느껴진다.

연예인 세계도 엄청나게 경쟁이 치열하다.
방송국에 연예인만 1,600여명이 있고, 그 중의 대다수가 무명이다.
다 아시겠지만 무명 시절은 기약도 없고 항상 배가 고프다.
그들이 제일 많이 하는 일은 연출자들에게 얼굴도장 찍는 일이다.
그래서 일이 있으나 없으나 매일같이 연출자들에게 얼굴이라도 한 번 더 보이려고 왔다갔다 한다.
무슨 일이든지 "많이 뛰고 만나서 얼굴도장 찍는 것"이 기본이다

내가 키가 이렇게 작은 게 어릴 때 못 먹고 일을 많이 해서 그렇다.
5학년 때부터였는데 그 때 제일 많이 한 일이 물지게를 지고 식수를 길어 나르는 일이었다.

인천에 살 때였는데 그 곳은 짠물이 많이 나서 식수가 절대적으로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그 때 그 무거운 물지게가 나를 짓눌러서 이렇게 키가 안 자란 것 같다.
밥도 짓고 등등 무지무지하게 힘든 나날이었는데, 그 때 어머니가 우리를 강하게 교육시키지 않았다면 오늘의

나는 없었을 것이다.
역시 교육이 중요한 것이다.

내가 "계모"라고 믿었을 만큼 어머니에게 많이 혼나고 얻어맞고 자랐는데, 그 땐 울면 더 맞았고 만약 변명이라도 할라치면 그 날은 완전히 죽는 날이었다.

여러분도 자녀를 키울 때 강하게 키워야 한다.

성인이 되어서 나약하고 자신의 실수 등에 대해 변명하는 사람은 절대 출세 못한다.
산에 가서 잡초를 뽑을 때도 뿌리 채 쉽게 뽑히지 않는다.
그만큼 혹독한 환경에서 악착같이 컸기 때문이다.

반대로 온실에서 자란 화초를 생각해보라.

살짝만 힘을 줘도 금방 뽑히지 않는가?
우리도 잡초처럼 살아야 하고 자녀도 그렇게 키워야 한다.

우리 어머니는 억척스럽게 일했다.

떡도 팔고 무엇이든 닥치는 대로 만들어 내다 팔았다.

그러던 끝에 돈을 모아서 서울로 이사를 하게 되었고, 이사하는 전날 밤에 짐 보따리를 전부 싼 상태에서

"원주야~" 하고 나를 부르시는 것이었다.
허구한 날 쥐어박고 꼬집고 꾸짖고 하시던 분이 처음으로 나를 다정하게 부르시는 것이었다.
안방으로 건너가니 어머니께서는 내 손을 따뜻하게 꼭 잡고 "큰 딸, 그동안 고생 많이 했다.
서울 가면 너 하고 싶은 것 전부 해 줄게" 하시는 것이었다.
그 때서야 나는 어머니의 사랑과 위대함을 알게 되었다.

어머니는 동대문 시장에 포목상을 내고 장사를 하셨는데, 그야말로 돈을 긁어 모을 만큼 수완이 좋았다.

손님이 오면 뭐라도 먹였다.

떡이든 주스든... 언젠가 내가 물어보았다.
엄마는 어째 그렇게 장사를 잘 하우? 어머니 말씀은 다음과 같았다.
"딴 거 없다. 손님 가슴에 거울을 대고 비춰 보면 된다"는 말씀이었다.
손님이 뭘 원하는지, 어느 정도가 어떤 일에 필요한지, 즉 손님의 가려운 곳을 알고 조금만 긁어 주면 된다는

것이었다.
특히 뭔가를 정성으로 대접하는 것은 제일 중요하다는 것이었다.
손님이 주스를 마시는 사이 어머니는 옷감을 몇 마! "부~욱" 자르면서 이게 제일 좋습니다~"하고 말하면
그 손님은 "어 어~" 하면서도 웃고 그냥 그 물건을 사가는 것이었다.
그 정도로 장사 수완이 있었으며 나는 그것을 "찬스"에 강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여러분도 찬스에 강해야 한다.

그리고 항상 무엇이든 간에 대접을 하면 반드시 효과적이라고 생각한다.

부부도 성격이 맞아야 뭐라도 잘 되는 것 같다.

우리 어머니가 그렇게 목소리도 남자 같고 성격도 화끈 털털했던 반면 아버지는 정반대였다.
조용하고 소심하고 목소리도 여자 같았다.

어머니 같으면 손님이 최종 결정을 말하기 전에 이미 분위기를 주도해서 옷감을 부욱 자르고 있었을 텐데

아버지는 손님이 최종 결정을 하기 전까지는 꼼짝 않고 가위만 들고 서있는 그런 유형이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장사가 끝난 후에 물건을 다시 정리해서 가지런히 재진열하고 회계 정리를 하고 하는 일에는

특출하셨다.
두 분이 고스톱을 칠 때면 어머니는 이미 이것 저것 따와서 점수가 나 버렸는데, 아버지는 그 순간에도 자기가

따와서 무릎 앞에 깔아 놓았던 오끗 짜리나 열끗 짜리 몇 장이 비뚤어지지 않도록 각을 가지런히 잡고 있는

그런 스타일이었다.
일의 순서도 큰 일을 먼저 해야 빨리 성공하는 것 같다.

내가 성장해서 연예인 생활을 하면서 가정부 역만 20년을 했다.
주인 마님만 강부자, 여운계, 사미자 등으로 수도 없이 바뀌어도 나는 영원한 가정부였다.
많은 사람들이 내가 대학 출신(숙명여대)이라고 하면 목젖이 보이게 놀라고, 이렇게 작은 전원주도 운전하고

다닌다고 하면 더 놀란다.
한 번은 운전을 하고 가는데 경찰이 보고 사람 없는 차가 혼자 굴러가는 줄 알고 뒤쫓아온 적도 있었다.
그런 일이 내겐 엄청난 스트레스였고, 나는 "연예계 생활의 첫 단추를 한 번 잘못 꿰어서 계속 그런 이미지만

갖고 산다"고 느꼈다.

사실 나는 처음에는 교편을 잡았었다.

한 번은 학교에서 학생들이 잘못한 일이 있었는데, 훈육선생이 그걸 보고 "너희들 똑바로 서 어금니 꽉 깨물어" 하는 것이었다.

그 때만 해도 여학생들도 뺨 정도는 다 때렸으니까.

그러면서 학생들을 한 명씩 뺨을 때리는데, 옆에 섰던 나도 학생인 줄 알고(키가 작으니) 뺨을 가차없이

때리는 것이었다.

나는 그 자리에 쓰러진 채로 결심을 했다.
"이건 내 일이 아니다" 그리고 학교를 퇴직했다.

뭘 할까 하다가 바로 그 당시 동아방송에서 공모했던 성우 모집에 응했다.

하느님은 정말로 공평하셔서 나는 목소리 하나는 타고 났었다.
프로그램을 맡아서 방송을 하는데 목소리가 너무 고와서 꽤 인기였다.
내 목소리만 듣다가 얼굴 한 번 보겠다고 방송국에 와서 내 얼굴 보고 졸도한 남자 여럿 있었다.

어쨌거나 말은 인격이라고 했다.
말 한 마디로 천 냥 빚을 갚기도 하고...
말은 한결같이 잘해야 한다.

운전하는 사람이 평소에는 곱게 말하다가 다른 운전자가 끼어 들기라도 하면 바로 험한 얘기가 튀어나온다.
그걸 애들이 배우는 것이다.
말을 잘 하는 것은 본인에게도 좋지만 자녀에게는 산 교육이 되는 것이다.

내가 TV 방송에 출연할 때 얘기를 하겠다.
아까도 얘기했지만 연예인 세상은 엄청나게 치열하다.
흐지부지 목적없이 살면 절대로 좋은 길로 못 가고 운전하다 1분 안에 세 번 차선을 바꾸는 사람과는 상종하지

말라는 말도 있듯이 탤런트는 굳건한 의지를 가져야 산다.
대사를 다 외우는 것은 기본 중의 기본이고, 잊어 먹지 않도록 암기 연습도 죽도록 하고, 연습 시간을

확보하려면 시간 관리에 철저해야 한다.

그래도 떨면 대사를 까먹기 마련이라 배포까지 키워야 한다.
그래야 캐스팅이 잘 된다. 여러분들의 계약 활동하고 똑같지 않느냐.

우리는 녹화에 3번 지각하면 쫓겨나고, 같은 장면 NG 세번 내면 다음부터는 안 써준다.

통상적으로 남자가 더 떨었던 것 같다.
밥을 씹으면서 연기하면 대사를 까먹을까 봐 씹지도 않고 얘기하다
밥알이 다 튀기도 하고...
내가 무당 역을 맡을 일이 있었는데
그 때의 대사 중에 가장 힘든 것이 귀신 이름을 7가지 외우는 것이었다.
일주일 내내 연습했는데 연기 도중에 예상치 않았던 꽹과리 소리가 요란히 울리는 바람에 그만 까먹고 말았다.

그 때부터 연출자들 사이에 "전원주는 새대가리"라는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소문은 진짜 무서운 것이다. 한나절에 무려 30명에게 전파를 하더라.

김을동 씨는 잠이 많아서 지각을 하는 바람에 배역을 못 받은 적도 있었고, 김성환씨는 극중 대감 이름 7명을

줄줄이 읊어야 했는데, 그걸 컨닝을 하려는 요령을 피우려다 누군가가 컨닝용으로 대감들 이름을 적어놓은

부분을 지우는 바람에 막상 그 대목에서 너무 당황하여 "최불암 대감, 박근형 대감..." 등으로 실제 인물의

이름을 말하는 바람에 6개월간 배역을 못 받은 적도 있었다.
그 때부터 전원주 = 가정부, 김성환 = 도둑(운 좋으면 포졸)으로 이미지가 굳어버렸다.

7이라는 숫자 때문에 고생한 우리들이었다.
밑바닥 생활이 얼마나 힘든 것인가. 마님 역할은 비스듬히 누워서 "밥상 들이거라" 하는 말 한 가지면 끝나지만 가정부 역은 밥상 들고 방문을 10번 이상 들락 날락 거리고, 상이 바닥에 소리 안 나게 놓아야 하는 등,

노동도 그런 노동이 없다.

게다가 애까지 업은 채로 밥상을 나르는 역이 있는 날이면 정말 중노동이었다.

그러고도 집에 오면 그 장면 하나라도 보려고 TV를 켜면 안 나올 때가 부지기수였다. 편집된 것이다.

우리들은 방송에서 편집되면 그나마 한 푼 출연료조차 없는 시절이었다.

그 때문에 결혼해서 애를 다 키우면서까지도 나는 우리 어머니께 얻어맞고는 했다.
동네 아주머니들이 "TV 에 안 나오거나 나와도 가정부에다 그나마 1, 2초면 사라진다..."등등 어머니 부아를

돋구었기 때문이었다.
어머니는 그랬다. "이 년아 다 괜찮은데 어째 너 하나가 이리 속을 썩이냐. 너만 잘 풀리면 원이 없겠다..."

그러나 나는 돈 한푼 없었어도 매일같이 방송국에 출근했다.
얼굴 도장을 찍기 위해서였다.

김성환씨하고 함께 방송국에 들르는 날이면 많은 사람들이 쳐다보며 자기들끼리 수군거렸다.
"저기 봐. 식모하고 도둑놈하고 또 왔네"하고...
아들놈이 국민학교를 졸업하는 날이었다.

아들놈이 보고 싶고 축하해주고 싶어서 학교에 갔는데, 아무리 둘러봐도 보이지 않기에 집에 왔더니 벌써

돌아와 있는 것이었다.

그 때 아들 녀석이 한 말,
"엄마는 뭐 하러 학교에 와 가지고 망신을 시키고 그래..."
나는 묻지 않았지만 알 수 있었다.

애들이 나를 보고 "식모 왔다!"라고 놀렸을 게 분명했다.

그 때 나는 정말로 탤런트 생활을 때려치울까 밤을 새서 고민했었다.
성공한 지금에 와서는 곰곰이 생각해보면 성공에는 다음과 같은 4가지 원칙이 있다고 생각한다.

첫째 마라톤의 원칙이다.
과욕 부리지 않고 목표를 정하고 속도 조절하면서 꾸준히 뛰는 것.
둘째 날씨의 원칙이다.
비바람, 폭우가 몰아치는 날이 있어도 어느 날 분명히 해는 뜬다.
희망과 긍정적인 자세를 잃지 말고 실패해도 좌절하지 말고 오기를 갖고 인내하라.
셋째 합창의 원리이다.
사람들과 호흡을 잘 맞추는 사람이 인기가 있다.
노래방에서 제일 싫은 사람이 누구인가? 마이크 독점하는 사람,
남이 노래 부르는데 꼭 끼어 들어서 노래 망치는 사람,
악만 바락바락 쓰는 사람. 흥겨운 분위기에 처진 노래 부르는 사람.
넷째 등산의 원리이다.
처음에 산에 오르기로 해도 출발하기가 망설여진다.
그 때 과감하게 일어나서 출발하는 것이다.
한참을 오르다 보면 힘도 들고 땀도 난다.

그 때 이 정도만하고 그만할까 하는 생각이 들게 마련이다.

그 사람은 정상의 맛을 영원히 못 본다.

끝까지 올라가면 모든 것이 발 아래 있는 법이다.
정상의 맛은 아무나 느끼지 못한다.

참고 꾸준히 목표만 바라보고 인내를 거듭할 때 기회가 오는 것이다.

사람은 밝고 긍정적이어야 하는데, 나는 그렇게 연예계 생활에서 그 오랜 세월을 빛 한 번 못보고 구박만 받고

지내다 보니 항상 우울하고 사람들과 말도 않고 혼자서 중얼중얼 대는 습관이 생겼다.

그래서 별명이 '쭝얼이'였다.
먹고 살기도 힘들어서 시장을 봐도 미아리시장 밤 8시 정도 시장이 파장할 때 가곤 했다.

그 때 가면 팔다 남은 야채 등을 헐값에 살 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던 어느 날 밤이었다.
시장 어디에선가 장사하고 번 돈을 세는 아주머니 한 명이 시장이 떠나갈 듯 유쾌한 웃음을 웃어 대는 것이었다.
그 웃음을 듣는 순간 나는 그 순간 10년 묵은 체증이 쑥 내려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래 웃고 살자' 이렇게 굳게 결심했다.

그 다음부터 나는 매일 시도 때도 없이 집에서 거울을 앞에 놓고 웃는 연습을 했다.

아들이 "엄마 왜 그래, 웃지마 귀신 나올 거 같아." 할 정도로 미친 듯이 웃어 제꼈던 것 같다.
그랬더니 10일만에 웃음 소리가 시원하게 터져 나오는 것이었다.
방송국에 들른 나는 갑자기 한 생각이 떠올랐다.
"그래, 연출자들한테 약이나 올려 주자".
연출자 대기실에 연출자들이 20명 정도 모일 때를 기다려 문을 살그머니 열고 들어가서 갑작스럽게 "와하하하~~~" 하고 사무실이 떠나가라 웃어 주고는 뒤도 안 돌아보고 나왔다...
나오는 내 눈에 눈물이 고였다.
'내, 이 나이에 이런 짓까지 해야 하다니'하는 생각 때문에.

그랬는데 어느 날 새 드라마를 방송하게 되었는데 조연 중에 한 명으로 내가 발탁되었다.

시골의 순박한 아주머니 역할이었는데, 시골 아줌마들은 통상적으로 목소리도 크고, 웃음도 잘 웃어야 하는데,
연출자들이 혼비백산하도록 웃어 제꼈던 그 날의 내 행동이 인상깊게 남아있다가 '드라마 성격에 전원주

웃음소리가 딱이다'라는 의견이 터져 나왔던 것이었다.
그 드라마가 바로 그 유명한 '대추나무 사랑 걸렸네' 였고 장장 7년 6개월을 장수한 대히트 드라마였다.
거기에서 드디어 나는 떴던 것이었다.

그만큼 방송국에서의 경쟁은 엄청나게 치열한 것이었고 나도 죽을 힘으로 경쟁했던 것이다.

우리 어머니는 아까도 말했듯이 모든 것을 다 책임져 내신 분이셨는데 막상 본인의 건강을 책임지지 못하셨다.

수금하러 갔다가 언쟁 중에 쓰러지셔서 중풍을 맞고 13년 8개월을 병석에 누워 계시다가 당뇨, 실명까지 와서

별세하셨다.

어머니 상을 치를 때 극중 내 남편역인 김인문 씨가 와서 마치 사위처럼 모든 일을 다 치뤄 주었다.
사람들이 우리 집안의 사위가 바뀐 줄 착각할 정도였다.
그런 헌신적인 도움을 받고 나는 "이것이 사람이 더불어 살아야 하는 이유이자 도리"라는 것을 깊이 느꼈다.

여러분도 건강해야 하고 그러려면 스트레스를 해소할 줄 알아야 한다.
그러기에는 시원한 웃음과 노래가 제격이다.

아울러 사람들과 더불어 살고 돕는 것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렇게 나는 오랜 고생 끝에 인기인이 되었다.

CF 도 줄줄이 찍었고...
20년을 참고 뜬 태양은 지지도 않더라.
여러분도 인내하고 밀어붙이고 노력하면 성공한다.
지금 난 일년치 스케줄이 새카맣다.
오늘만 해도 네 군데 일정이 있다. 강연 2번, 녹화 2번.
일이 많으면 피곤하지도 않고 일이 없을 때 힘들고 피곤한 법이다.
노력하는 사람은 작아도 커 보인다.

얼굴이 이뻐도 행동이 미우면 박색이고 얼굴이 미워도 하는 짓이 이쁘면 양귀비로 보인다.
살면서 근면하고, 절약하고, 원칙을 세우고, 남편과 자식들한테 잘해주고... 해야 할 것이 많다
난 꿈이 또 있다. 음반을 내고 가수가 되는 것이다.
지금 댄스 가수들이 나를 보고 '후배'님이라고 웃으며 얘기한다.
내 나이 66세이지만 80세까지는 끄떡없이 뛸 자신이 있다.

여러분도 오로지 내일을 향해 뛰기 바란다.




출처 : ironcow6200
글쓴이 : ironcow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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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2월23일

민기가 어떻게 수소문을 해서 우리 바에 놀러 왔다.

우리는 너무도 반가워 한참을 부둥켜 안고 폴짝 폴짝 뛰었다.

겨우 반년만의 재회인데 이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녀석은 구리빛 피부에 근육질 몸매로 많이 아주 많이 건강해져 있었다.

아기도 지금은 더많이 건강해졌다고.

아울러 기쁜 소식은 애 엄마가 작년 말에 다시 돌아 와서 이제는 세식구가 아버지 근처 이 근방에서 살고 있다고 했다.

민기도 호스트 일은 내가 떠난 직후 그만 뒀다고 한다.

지금은 한국 여행사에서 해양 스포츠 조교 일을 하고 있다고 했다.

너무너무 기뻤다.

뭐라고 말할 수없이 행복한 시간들이다.  

 

2006년 3월1일

오늘도 제일 먼저 출근해서 열심히 냉장고에 맥주를 채워 넣고 있는데 한국에서 전화가 왔다.

어머니셨다.

어머니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씀하셨다.

오늘부로 내가 남기고 떠난 그 모든 빚잔치가 끝났다는 것이다.

나는 도저히 믿겨지지가 않아 또 묻고 또 묻고 그렇게 몇십번은 되 물었던 것 같다.

어머니께서는 미세히 떨렸지만 침착한 천상의 어조로 '틀임없다.'라고 전부 확인시켜 주셨다.

그제서야 내 눈앞으로 지난 삼년간의 모든 일들이 영사기 필름처럼 촤르르르 스쳐 지나 갔다.

멕시코,L.A,뉴욕,하와이,다시 뉴욕 또 다시 이곳 하와이.

그리고,

내 어머니..!

한참을 죄스러움에 오열을 하였다.

그렇게 몇시간을 울고 나니 한순간 갑자기 너무도 너무도 가벼워 졌다.

마치 내가 깃털인 것 마냥 공중에 붕 떠서 살랑이는 기분을 맛봤다.

그런데 연이어 엄청난 허망함이 내 전신을 덥쳤다.

나는 재빨리 맥주를 마시기 시작했다.

 

2006년 3월5일

바가 문을 닫을 무렵 도현이가 펠레에 나타났다.

마침 남아 있는 손님은 없었고,우리 둘은 바에 앉아 맥주 몇병을 마셨다. 

마음이 가는데로 이끌려 갔다.

하늘을 올려다 볼 수 있는 그 차에서 그녀가 내 고개를 젖힌다.

달빛이 맑다.

 

오랫만이라 걱정도 해보았지만 어색하지는 않았다.

그녀의 입술은 여전히 따뜻하고 부드러웠다.

행복하다.

장소를 옮기니 음악이 흘러 나왔다.

Santana의 Smooth.

감회가 새롭다.

그렇게 우리는 몇번이고 사랑을 나누고 잠을 청했다.

그녀는 이내 잠들었지만 나는 날이 밝도록 잠이 오질 않았다.

밤새 잡고 있던 그녀의 손이 그제서야 스르르 떨어 진다.

'그래,편안하다.'

 나는 순간 편안한 감정을 느낀 내 자신을 보았다.

 갑자기 무서운 생각에 그녀의 체온을 느끼려 살짝 팔을 부볐다.

그녀가 뒤척이길래 얼른 다시 팔을 떼어 버렸다.

 

그저 도현이가 행복했으면 좋겠다.

그녀가 아주 많이 행복했으면 좋겠다.

 

2006년 3월7일

도현이에게서 돈을 받았다.

필요하였기에 두 눈 질끈 감고 덥석 그 5000불이란 돈을 받아 버렸다.

난 정말 멋진 영화를 만들거다.

그래,그러자!

 

2006년 3월10일

우리 바에 놀러 오는 몇몇 안되는 한국인 손님들 중 내 또래의 친구가 생겼다.

MIKE.

이곳에서 태어나고 자란 친구인데 벌써 애가 둘이 있단다.

 예전 펠레의 바텐더였다는데 지금은 로컬 택시 드라이버이자 이곳의 단골 손님이다.

매일 나에게 하와이에서 여자 가장 많이 꼬실 수 있는 직업은 택시 드라이버라며 생각있으면 언제든지 얘기해 달란다.

넉살도 좋고 정도 많은 참 재미있는 친구가 생겼다.

 

'하지만 MIKE.

나는 불법 체류자야.

택시 드라이버가 되고 싶어도 면허증도 working permit도 없어.

여기도 겨우겨우 구한 직장이다.

참 기가 막히지!'

 

 

2006년 3월14일

하와이는 약 2천 8백만 년 전에 화산 폭발로 인해 생겨난 화산섬이라고 한다.

 
하와이안들은 그들만의 비밀이 있다.

그들이 어떻게 이섬에 존재하고 있으며,어디서부터 그들이 왔는지는 그들만이 알고 있다.

이들만의 구전방식으로 그 유구한 세월을 통해 종족만의 비밀로 지금껏 간직하고 있다고 했다.

외지인에겐 그 누구도 발설을 금하고 있다고.

 많은 서양인들이 그 비밀을 캐려고 했으나 번번히 그 결과는 아주 참혹했고 잔인했다고 한다.

 

결론은 하와이의 기원에 관하여

여러가지 학설과 추측은 난무하나

실상 원주민들은그런 이야기에는 신경도 쓰질 않는다.

그래서 정설이 없다는게 또한 참 재미있는 사실이다.

  

원주민들과 이야기를 해보면 그들은 아직 분노하고 있다.

그래서 아직까지도 이 땅은 그저 미국인들에게 빌려 준 것일뿐.

그들은 영원히 이땅을 그들만의 손으로 지켜 낼 것이라고 이야기 한다.

하지만 현재 하와이 원주민은 하와이 전체인구의 18%에 불가하다.

 

UA MAU KE EA O KA 'AINA I KA PONO O HAWAI'I 

(The life of the land is perpetuated in righteousness; 대지의 생명은 정의 가운데 영원히 존재한다)

하와이 주의 슬로건,주표어이다.

오늘 처음 알게 되었다. 

 

 

 

 

 

 

 

 

 

to be continue...

 

 

 

 

 

 

 

 

 

 

 

 

 

출처 : CLUB OSHALE LION
글쓴이 : OSHALE LION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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