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세영 (낭송 : 유현서) 사랑한다고 말할 때 남는건 허무뿐이다, 사랑한다고 말할 때 남는 건 그리움 뿐이다, 진실을 믿기 위하여 진실을 말하라지만 당신은 아름다운 에고이스트 사랑은 언제나 있고 사랑은 언제나 없다, 내가 믿는 것은 하나의 아픔, 하나의 허무, 하나의 그리움, 그리고 빗 속의 어두운 그림자, 사랑한다고 말할 때 사랑은 외로워진다.
나, 이런 길을 만날 수 있다면 이 길을 손 잡고 가고 싶은 사람이 있네 먼지 한 톨 소음 한 점 없어 보이는 이 길을 따라 걷다보면 나도 그도 정갈한 영혼을 지닐 것 같아 이 길을 오고 가는 사람들처럼 이 길을 오고 가는 자동차의 탄력처럼 나 아직도 갈 곳이 있고 가서 씨뿌릴 여유가 있어 튀어오르거나 스며들 힘과 여운이 있어 나 이 길을 따라 쭈욱 가서 이 길의 첫무늬가 보일락말락한 그렇게 아득한 끄트머리쯤의 집을 세내어 살고 싶네 아직은 낯이 설어 수십 번 손바닥을 오므리고 펴는 사이 수십 번 눈을 감았다가 뜨는 사이 그 집의 뒤켠엔 나무가 있고 새가 있고 꽃이 있네 절망이 사철 내내 내 몸을 적셔도 햇살을 아끼어 잎을 틔우고 뼈만 남은 내 마음에 다시 살이 오르면 그 마음 둥글게 말아 둥그런 얼굴 하나 빚겠네 그 건너편에 물론 강물이 흐르네. 그 강물 속 깊고 깊은 곳에 내 말 한마디 이 집에 세들어 사는 동안만이라도 나… 처음… 사랑할… 때… 처럼… 그렇게… 내 말은 말이 되지 못하고 흘러가버리면 내가 내 몸을 폭풍처럼 흔들면서 내가 나를 가루처럼 흩어지게 하면서 나, 그 한마디 말이 되어보겠네
가을 편지/박라연
어떤 주인은 장미, 그가 가장 눈부실 때에 쓰윽 목을 벤다 제 눈부신 시절을 제 손으로 쓰윽, 찰나에 베어낼 수 있는 그렇게 날카로운 슬픔을 구할 수만 있다면 꼭 한 번 품어보고 싶던 향기 꼭 한 번 일렁이고 싶던 무늬 왜 있잖아 연초록 목소리 같은 거 기가 막히게 어우러질 때 저 山 저 너무 훌쩍 넘어가고 싶다 아주 오래된 빈집이 있고 날카로운 슬픔의 주인이 있고 희미한 前生의 그림자가 있지만 이 모든 것 제 갈 길 가기 시작하면 나는……야 거북이처럼 느리게 골방으로 가서 습작 시절의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삼라만상 무한천공을 엿보리라 눈이 짓물도록 귀가 멍멍해지도록 머물다가 내 주인이 쓰윽, 목을 베면 한 세상 다시 피어 볼 붉히는 장미 장미 한 송이가 되리라